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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시답잖은 건물, 시다운 건축

등록 2016-08-26 19:00수정 2016-08-31 16:34

[토요판] 이일훈의 시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정세훈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아무 쓸모없는 듯
강폭 한가운데에
버티고 선
작은 돌섬 하나

있음으로 해서,

에돌아가는
새로운 물길 하나 생겨난 거지

운영자의 입장에서 관리상 편의와 치적만을 우선하고 이용자의 심리를 무시한 공공·문화시설은 시답잖은 건축이다(건축의 통제·전시는 얼마나 후진 일인가). 유명 건축가의 작품도 주변을 비웃으며 독불장군으로 있으면 그 또한 시답잖은 건축이다(건물만 멋지면 뭐하나, 품격이 빛나야지). 주변과 시민에 대한 배려는 없고 매상에만 신경 쓰는 유명백화점·대형매장의 건축적 자세 또한 시답잖다(그래서 재벌이 되어서도 존경 대신 욕을 먹는 거다). 세상에는 시다운 건축보다 시답잖은 건물이 더 많다. 볼품이 없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시답잖다’의 시는 씨·내용·본질·바탕·자취·행적 등을 뜻하는 열매 실(實)에서 온 말이지만, 필자는 자꾸 시(詩)에서 왔다고 믿고 싶다. 시가 투명한 정신에서 오듯 건축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의식을 구체화하여 세상에 권할 만한 건축은 시(詩)답고, 과시의 욕망과 자본의 증식도구로만 쓰이는 건물들은 시(詩)답잖다.

정치만을 위한 정치나 자본만을 위한 자본은 역겹고, 기술만을 위한 기술은 안쓰럽다. 상생의 세상과 존엄한 삶을 품으려는 예술과 철학의 자세는 얼마나 기꺼운가. 건축도 그중 하나, 건축만을 위한 건축이 아닌, 사회를 위한 건축은 주변을 변화시키며 사용자의 안목을 고양시킨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쉽게 가고 자연스레 머물 수 있도록 만든 도서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용자가 늘어나는 법, 짓기 전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건축이다. 형식적 공공에서 실질적 공동으로 의식을 확장시키고, 사유(私有)를 넘는 사유(思惟)로 활용의 범위를 넓히는 건축의 태도는 얼마나 의젓한가. 그런 건축은 흔한 재료와 단순공법으로 지어져도 저급한 것이 아니다. 볼품없어도 세상과 사람을 위해서 문을 활짝 연 건축, 그런 태도라면 ‘모난 돌이 정 맞’으면 어떻고, ‘달걀로 바위치기’면 어떠랴. 그런 건축이 “하나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어쩌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보이는 건축을 만나면,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조금씩 천천히 변하리라는 위안을 얻는다. 잘 지은 시 한 수가 못 지은 건물 열 채보다 낫다. 건축은 나무 숲 강 벌판 시장에서, 세상의 풍요 아닌 궁핍, 혼자 아닌 이웃, 과시 아닌 겸손에서 배워야 한다. 또 그걸 품은 시로부터 배우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래야 시다운 건축이 된다. 아니면 시답잖은 건물도 아닌 물건일 테니.

이일훈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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