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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간극의 비루함 속에서

등록 2016-08-26 19:00수정 2016-08-26 19:13

[토요판] 이주의 시인, 김소연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시집 <수학자의 아침> 수록-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치명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거기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치명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거기에 있었을 때에는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괴로워한다. 거기에 있지 못했을 때에는 거기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자책하고 애가 달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러한 나를 견디다 견디다 공책을 펴고 연필을 들고 나는 시를 쓴다. 시를 쓰면서 또다시 치명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어떤 단어는 도망치고 싶어하고, 어떤 단어는 자책하고, 어떤 단어는 애달아 하고, 어떤 단어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나는 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공책을 한 장 넘기고 다시 시를 쓴다. 또다시 엉망이 되지만, 다시 공책을 한 페이지 넘기고 다시 시를 쓴다. 몇 번을 그렇게 다시, 다시, 다시 하며 공책을 넘기는 와중에 나는 조금 달라져간다. 내가 거기에 있었거나 있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치명성들은 다시 겪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명백하디 명백한 현장들인 반면, 공책을 한 장 넘겨 마주하는 백지는 시를 쓰는 일을 얼마든지 다시 겪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겪고 싶은 일을 새롭게 다시 겪는 일 앞에서 비로소 나는 얼마간 차분해진다.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 문장이 아니라 맥락이, 맥락이 아니라 노래 비슷한 것이, 노래가 아니라 울먹임이, 울먹임이 아니라 불꽃이, 불꽃이 아니라 잿더미가 비로소 백지 위에 하얗게 쌓인다. 시는 온갖 실의와 실패를 겪어가며 끝장을 본, 한 줌 재인 셈이다. 아름다움에 매료되지만 아름다움이 어딘지 모를 비린내를 품고 있다는 것에 낙담하는 과정을 겪고, 괴로움인 줄 알았으나 괴로움이 종내는 비겁함의 다른 얼굴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겪는다. 애와 몸이 달았던 순간들이 겨우 남긴 온도를, 한 줌 재를 움켜쥐듯 시에 남긴다. 시를 쓰는 과정은 시인으로서 내가 겪는 과정이지만, 써진 시는 시인으로서 내가 알아챈 이 신랄한 간극들의 어지러움을 번번이 유실하고 만다.

언제나 어지럽다. 괴롭다. 삶에 대한 실의와 삶이 지닌 비의의 간극에서 가장 괴롭다. 실재하는 실의와 도래할 실의의 간극이 우선 무섭고, 비의를 감각하는 감각과 비의에 무감해지는 감각의 간극이 이미 두렵다. 살아가는 나와 시를 쓰는 나의 간극에 쩔쩔맨다. 내가 쓴 시와 시에 대한 내 입장에 생기는 간극에 버거워한다. 살아가는 내가 살아가야 할 나와의 간극만으로도 기겁을 하는 와중에, 내가 쓴 시와 시에 대한 내 입장과의 간극은 냉엄하기 짝이 없다. 이 간극들 한복판에서, 나는 겨우 공책을 펴고 연필을 들고 시를 적는다. 시를 적는다지만, 간극들을 헤아리느라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허우적거림이 무용수의 몸짓과도 같이 지극한 갈망을 드러낼 때, 그때에만 시를 썼다고 말할 수 있다. 시는 그러므로 차분한 것 같지만 실은 시끄럽고 무섭다. 입을 봉인한 채 몸으로 지르는 비명이라서 침묵이나 적요에 가깝다 느껴질 뿐, 시는 열렬하고 아프다. 시는 단지 그뿐이다. 단지 그뿐일까. 그뿐이어도 될까. 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해도, 굳이 무엇을 할 이유가 없다 할지라도, 무엇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시는 멀리 어딘가로 혼자서 간다. 나는 남겨진다. 다시 한번 시와 나의 간극이 발생한다. 그러다 보면 보이는 게 있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기보다는 보이던 것이 다르게 보인다. 보이던 것이 다르게 보일 때까지, 다르게 보인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때까지, 공책을 다시 한 장 넘기고 다시 또 한 장 넘긴다. 다음 페이지에 펼쳐진 백지 앞에서 나는 다시 사는 것만 같다. 다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가 내 멱살을 잡고 싶을 때에 백지는 나에게 도착지인 동시에 출발지가 되어주는 유일한 장소다. 그 장소를 펼쳐놓고서 나는 시를 쓴다. 혼나고 싶어서 시를 쓰는 것 같다. 시를 쓴 날에는 다리를 뻗고 잠을 자도 될 것만 같은데, 비루하나마, 들키고 혼나고 벌을 받고 나면 어지러움이 잦아들고 세계가 잠시 투명해지는 것이다.

김소연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를 출간했다.


시인,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가네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끝없는 혼란이며 혼란 자체로 두어도 좋은 무엇이다. 혼란이 끝나면 사랑도 끝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해는 흐릿한 것이 명료해지는 상태로, 모호함과 혼란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가능한 경지다. 문제는 사랑의 대상과 이해의 대상이 같을 때 발생한다. 사랑하면서 이해하는, 반대의 방향을 동시에 여행해야 할 때 말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대개 이 범주에 속하는데, ‘나’와 ‘당신’과 ‘삶’이 그중 최악(?)의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에게는 이 모두를 총칭하는 ‘시’.

언어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생의 과업을 돕기도 하지만 심각하게 방해하기도 한다. “죽일 수도 때릴 수도 없었던/ 당신의 열렬함과 통증 사이// 단열이 잘되던 모음들/ 방음이 잘되던 자음들”(‘명왕성으로’). 소통의 수단이며 “존재의 집”(하이데거)인 언어는 차단의 성능이 우수한 재료로 이루어졌다. ‘당신’과 ‘내’가 서로의 말에 부딪쳐 난폭한 슬픔에 젖을 때, ‘당신’과 ‘나’는 우리의 사랑을 안락하게 했던 언어가 지닌 차단의 성능을 다른 각도로 확인한다.

이제, 사랑하면서 이해하는 일의 딜레마는 더 깊어진다. 사랑은 간극을 건너뛰며 도약하고 성장할 수 있지만, 이해는 간극을 건너뛰면 비약이 되어 무너진다. 완충 장치가 없지는 않다. 사랑은 설명 없이, 이해는 설명을 조건으로, ‘당신’과 세계의 갈라진 틈을 직관으로 메울 수 있다. 김소연은 직관이 뛰어난 시인인데, 그녀는 직관으로 삶의 간극을 메우기는커녕 더 자세히 보고 느끼고 확인한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간극을 견딜 수 없어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그녀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없어지는 것을 선택했다”(‘시인’).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의 몸으로,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되”어 이곳에 머무는 존재이다. “극에 달하”는 간극이, 간극과 간극으로 이어진 삶이, 시가 시인을 관통한다. 김소연은 고통스러워하지만, 개의치는 않는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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