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주의 시인, 김소연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시집 <수학자의 아침> 수록-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시집 <수학자의 아침> 수록-
시인,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가네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끝없는 혼란이며 혼란 자체로 두어도 좋은 무엇이다. 혼란이 끝나면 사랑도 끝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해는 흐릿한 것이 명료해지는 상태로, 모호함과 혼란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가능한 경지다. 문제는 사랑의 대상과 이해의 대상이 같을 때 발생한다. 사랑하면서 이해하는, 반대의 방향을 동시에 여행해야 할 때 말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대개 이 범주에 속하는데, ‘나’와 ‘당신’과 ‘삶’이 그중 최악(?)의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에게는 이 모두를 총칭하는 ‘시’. 언어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생의 과업을 돕기도 하지만 심각하게 방해하기도 한다. “죽일 수도 때릴 수도 없었던/ 당신의 열렬함과 통증 사이// 단열이 잘되던 모음들/ 방음이 잘되던 자음들”(‘명왕성으로’). 소통의 수단이며 “존재의 집”(하이데거)인 언어는 차단의 성능이 우수한 재료로 이루어졌다. ‘당신’과 ‘내’가 서로의 말에 부딪쳐 난폭한 슬픔에 젖을 때, ‘당신’과 ‘나’는 우리의 사랑을 안락하게 했던 언어가 지닌 차단의 성능을 다른 각도로 확인한다. 이제, 사랑하면서 이해하는 일의 딜레마는 더 깊어진다. 사랑은 간극을 건너뛰며 도약하고 성장할 수 있지만, 이해는 간극을 건너뛰면 비약이 되어 무너진다. 완충 장치가 없지는 않다. 사랑은 설명 없이, 이해는 설명을 조건으로, ‘당신’과 세계의 갈라진 틈을 직관으로 메울 수 있다. 김소연은 직관이 뛰어난 시인인데, 그녀는 직관으로 삶의 간극을 메우기는커녕 더 자세히 보고 느끼고 확인한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간극을 견딜 수 없어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그녀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없어지는 것을 선택했다”(‘시인’).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의 몸으로,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되”어 이곳에 머무는 존재이다. “극에 달하”는 간극이, 간극과 간극으로 이어진 삶이, 시가 시인을 관통한다. 김소연은 고통스러워하지만, 개의치는 않는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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