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몇 년 전, <멜랑콜리아>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고 깊은 우울에 빠졌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극도로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슈퍼맨도 인공지능도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세계에서, 주인공과 그 이웃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완전한 종말. 비록 가까운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지만 나는 아득해졌다. 창작을 하고 무대에 서는 음악가라면 누구라도, 두고두고 연주되는 곡이나 기억에 남을 공연으로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하지만 지구 전체가 사라져 인류와 문명이 소멸해 버린다면 그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런 공허감이 내 발목을 잡아채고 나 자신과 나의 작업이 모두 진창에 빠져 있을 즈음, 이 시가 다시 생각났다. 내가 커다란 바위는 아닐지라도 작은 등산용 표지리본이나마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모래알이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일을 놓지 않고 가정을 만족시키기란 예상대로 쉽지 않았고, 나는 전 인류를 걱정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주먹 움켜쥐어도 뿔뿔이 흩어져 바람에 날려가 버릴 개인으로서는 힘에 부쳤다.
이 시를 처음 보고 내가 떠올린 사막은 커다란 모래더미였다. 하지만 모래와 모래 ‘사이’라니. 모래의 결정 구조와 그것들을 버티는 물리적 공간으로 가득한 딱딱한 머리로 나는 ‘사이’를 상상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시인의 선언에 대해 생각했다. 각각의 모래알은 다른 모래알들과 어떤 사이이기에 그 수많은 ‘사이들’을 모래보다 먼저 하나의 명사로 호출해 냈을까.
밤늦게 끝나는 일정이 잦아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불가능했던 나는, 마을 사람들이 시작한 작은 육아공동체에 합류하면서 대안을 찾았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듣고 입으로는 외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이 이루는 관계의 실재를 이처럼 내밀하게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작은 힘을 모으고, 아이들을 너나없이 돌보는 과정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기꺼운 의미를 건져 올렸다. 나아가 우리가 얻은 것을 서로 나누며 마을의 작은 변화를 꿈꾸는 마을 카페도 열게 되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수많은 잎들처럼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이 사회가 건강해야 나와 내 이웃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음악인들 중에서도 이렇게 ‘사이’를 나눠갖는 친구들이 있다. 세월호 프로젝트 앨범 ‘다시, 봄’은 가수와 작곡자, 시인, 연주자뿐만 아니라 기획자, 프로듀서, 음반 디자이너, 그리고 동영상 제작자까지 모두가 자신의 곁을 내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 성취를 우선으로 두었던 내 모습을 되돌아 보았다. 이 한 알의 모래는 얼마나 볼품없고 무력했던가. 하지만 지금 내 주위의 재즈 연주자들은 전반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동료 음악인들의 고충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다.
물론 이 모든 ‘사이’들이 마냥 아름답거나 순탄하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비록 기록되거나 기억되지 않을지언정 우리가 현재를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 세상이 사막 같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이’들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오래된 일이다’.
말로 재즈뮤지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