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 주의 시인, 문태준
아침을 기리는 노래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수록-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수록-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 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 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문태준 시인
마음의 역사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 /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문태준의 시집 <가재미>(2006)에 실린 시 ‘바닥’의 처음과 끝 부분이다. 봄이나 여름과 달리 가을에 “바닥이 잘 보이”는 까닭은 ‘상실’에 있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지금 옛일이 된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거나 셋이다. ‘그대’와 ‘사랑’과 ‘나’. 그대를 잃었고, 사랑하는 일을 잃었으며, 그대를 사랑하는 ‘나’를 잃었다. 텅 빈 삶의 허공이 펼쳐진다. 허공의 바닥까지 훤히 보인다. 텅 빈 삶의 허공은 전체가 바닥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이다. 허공의 바닥이며 바닥의 허공인 시공간. 번성의 시간에 가려 있던 허공이 드러나는 ‘가을’은 마음의 통로이자 삶의 통로다. 공중에서도 바닥을 보는 시선의 비밀은 ‘마음의 공간화’에 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간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시의 중요한 기술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공간의 형태로 가시화하고 입체화한다. 어떤 속성의 것이든 모든 공간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으므로, ‘마음의 공간화’는 시간을 동반한다. 지나간 삶이, 기억이 공간에 새겨진다. 공간의 구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문태준은 ‘마음의 공간화’에 능한 시인이다. 문태준 시에 구축된 공간들은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자연의 질서와 시골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오래 쌓이고 농축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공기 속에서 휘발되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천천히 낡아간다. 말하자면 문태준은 강인한 기억력을 지녔다. 그는 현대의 공기를 숨쉬면서도, 현대 이전의 세계에 뿌리를 둔 자신의 마음의 역사를 살아내고 만드는 일에 충실하다. 이 마음의 역사가 상당 부분 ‘상실’로 이루어져 있음은 이미 본 그대로다. 시 ‘아침을 기리는 노래’에서 문태준의 마음의 역사는 ‘자기 앞의 생’을 향해 직진한다.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모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과 “그리고 당신”. 당신을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고 했던가. 내가 다시 맞이한 “오늘 아침”의 감사한 삶은 ‘당신’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내 삶의 모든 곳에,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당신. ‘나’는 다시 ‘당신’을 고른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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