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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어머니께서 솥에 태양을 쏟아부으실 때

등록 2016-09-23 19:26수정 2016-09-23 19:46

[토요판] 이 주의 시인, 문태준
아침을 기리는 노래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수록-

어느새 가을이다. 수풀이 말라간다. 수척해진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현을 켜는 듯 애절하다. 불덩이 같던 여름은 지나갔다. 불볕에서 일하느라 검게 그을린 사람들을 지난여름엔 유난히 많이 만났다. 고통을 견디며 우리의 삶은 매일 계속된다. 그리고 매일 아침을 받는다.

아침은 시간이라는 가지에 풋사과처럼 달려 있다. 아침은 시간이라는 가지에 햇배처럼 달려 있다. 아침의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분배한다. 모든 이들에게 같은 개수의 과일을 공평하게 나눠준다는 분배의 원칙은 어긋난 적이 없다. 마치 이것은 비가 하나의 화단에 내릴 때 화초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빗방울을 뿌려주는 것과 같다. 비는 잎이 넓거나 좁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화초에게 내려 잎과 뿌리를 충분히 적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침이라는 시간을 공평하게 받는다. 인자한 사람도 옹색한 사람도 아침이라는 시간을 공평하게 받는다. 시간은 아침이라는 과일의 개수를 꼭 같은 개수로 사람들에게 나눠줄 뿐만 아니라, 가을 햇살과 꽃과 새와 잠을 공평하게 나눠준다.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아침을 받으면서 나의 새로운 하루가 평화롭기를 기도한다. 웃을 일이 좀 더 많고, 마음이 탁해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늘려주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함께 기뻐하기를 기도한다.

탁 트이고 광활한 초원에서 방목하는 이들이 맞는 아침은 보다 실감이 있는 듯하다. 몽골 시인들이 쓴 시편들에서 이러한 점은 잘 드러난다. 몽골의 시인인 쩨. 사롤보잉은 “어머니는 솥에 태양을 퍼올렸다 쏟아부으시며/ 회색빛 나무 그릇에/ 만들어진 황금의 햇살을 따르신다”라고 썼다. 또 다른 몽골 시인인 데. 체데브는 ‘아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깊은 잠에서 넓고 평화로운 초원?소녀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슬의 눈물이/ 꽃잎의 속눈썹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투명한 태양이 솟아오르며/ 소녀의 얼굴을 빛으로 조용히 어루만졌다./ 빛의 손바닥으로 눈물을 남몰래 닦아준다.” 초원을 소녀에 비유하면서 아침이라는 빛의 손바닥이 그 소녀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쓰고 있다. 새날 새 아침에 대한 긍정과 기대가 잘 표현되어 있다.

내가 경험한 아침이 희망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아침은 궂은비가 내리는 날에 다름 아니었다. 어려운 형편은 다음날 아침에도 이어졌고, 등뼈를 주저앉히는 절망은 다음날 아침에도 이어졌다. 우울과 근심은 다음날 아침에도 장마철의 비구름처럼 지붕 위를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침마다 무언가를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쌓아올리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농부들이 아침보다 먼저 일어나 논과 밭으로 나가고, 그리하여 소와 염소에게 먹일 풀짐을 한 짐 지고 와 쌓아올려 두는 것처럼.

아침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가보지 않은 길의 초입과 같다. 아침에 우리는 여럿의 기회를 갖게 된다. 나는 매일 아침 내가 좀 더 자애롭기를 희망한다. 나의 마음이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같았으면 하고 바란다. 유연하고 여지가 좀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쓴 다음의 졸시 ‘아침’도 이와 같은 생각에서 함께 태어났다.

아침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 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 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이 있다.


마음의 역사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 /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문태준의 시집 <가재미>(2006)에 실린 시 ‘바닥’의 처음과 끝 부분이다. 봄이나 여름과 달리 가을에 “바닥이 잘 보이”는 까닭은 ‘상실’에 있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지금 옛일이 된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거나 셋이다. ‘그대’와 ‘사랑’과 ‘나’. 그대를 잃었고, 사랑하는 일을 잃었으며, 그대를 사랑하는 ‘나’를 잃었다. 텅 빈 삶의 허공이 펼쳐진다. 허공의 바닥까지 훤히 보인다. 텅 빈 삶의 허공은 전체가 바닥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이다. 허공의 바닥이며 바닥의 허공인 시공간. 번성의 시간에 가려 있던 허공이 드러나는 ‘가을’은 마음의 통로이자 삶의 통로다.

공중에서도 바닥을 보는 시선의 비밀은 ‘마음의 공간화’에 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간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시의 중요한 기술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공간의 형태로 가시화하고 입체화한다. 어떤 속성의 것이든 모든 공간에는 시간이 깃들어 있으므로, ‘마음의 공간화’는 시간을 동반한다. 지나간 삶이, 기억이 공간에 새겨진다. 공간의 구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문태준은 ‘마음의 공간화’에 능한 시인이다. 문태준 시에 구축된 공간들은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자연의 질서와 시골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오래 쌓이고 농축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공기 속에서 휘발되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천천히 낡아간다. 말하자면 문태준은 강인한 기억력을 지녔다. 그는 현대의 공기를 숨쉬면서도, 현대 이전의 세계에 뿌리를 둔 자신의 마음의 역사를 살아내고 만드는 일에 충실하다. 이 마음의 역사가 상당 부분 ‘상실’로 이루어져 있음은 이미 본 그대로다.

시 ‘아침을 기리는 노래’에서 문태준의 마음의 역사는 ‘자기 앞의 생’을 향해 직진한다.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모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과 “그리고 당신”. 당신을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고 했던가. 내가 다시 맞이한 “오늘 아침”의 감사한 삶은 ‘당신’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내 삶의 모든 곳에,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당신. ‘나’는 다시 ‘당신’을 고른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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