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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불안과 공포가 아닌 미안함

등록 2016-09-23 19:26수정 2016-09-23 19:58

[토요판] 박주민의 시
지진   도종환

우리가 세운 세상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찬장의 그릇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비명을 지르고
전등이 불빛과 함께 휘청거릴 때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줄 몰랐다
우리가 지은 집 우리가 세운 마을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났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폐허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황망함 속에서 아직 우리 몇은 살아남았다
여진이 몇 차례 더 계곡과 강물을 흔들고 갔지만
먼지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새풀이 돋기 전에
벽돌을 찍고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종을 울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숲과 새와 짐승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좀 더 높은 언덕에 올라 폐허를 차분히 살피고
우리의 손으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노천 물이 끓으며 보내던 경고의 소리
아래로부터 옛 성곽을 기울게 하던 미세한 진동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야 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은 그만하기로 하자
충격과 지진은 언제든 다시 밀려올 수 있고
우리도 전능한 인간은 아니지만
더 튼튼한 뼈대를 세워야 한다
남아 있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삽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로 등을 밝히고
떨리는 손을 모두어 힘차게 못질을 해야 한다
세상은 지진으로 영원히 멈추지 않으므로

설마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시가 이렇게 강렬히 기억 속에 다시 떠오를 줄 몰랐다. 아마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진’. 이 얼마나 지금 이 시기에 떠올리기 쉬운 제목인가. 단지 제목 때문에 다시 떠올렸으나 다시 읽어 본 시는 내용으로도 충분히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우선 이 시는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자신이 세운, 그리고 살아가는 세상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매우 자주 깨졌으나 또다시 반복된다. 그래서 차라리 오만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라고 불러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오만함 아니 어리석음으로 인해 치명적인 위험이 노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시는 인간의 반성과 성찰을 이야기한다. 그 반성과 성찰은 지진을 계기로 오는데 지진으로부터 본인들이 받은 피해만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 이웃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서부터도 온다. 시에서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단 말은 그만하기로 하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이것이다.

사실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구절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비슷한 파문이 일었었다. 단지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참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미안함을 느꼈었다. 세월호 참사는 누가 봐도 엉망진창인 이 사회가 바로 참사의 원인이었다. 그 엉망진창의 원인 중 하나이거나 혹은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방기해 엉망진창을 야기했었을 수밖에 없었던 어른으로서 누구나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는 황망함과 미안함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세우자고 나선다. 과거의 교훈을 제대로 새겨 더 이상 누군가가 희생되지 않는 안전하고 튼튼한 사회를 그것도 우리의 손과 삽질로 만들자고 한다. 참사와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그것도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만드는 새 사회는 이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물론 이렇게 세운 새 사회 역시 다시 올 커다란 지진에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슬픈 비극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세상은 지진 한 번, 참사 한 번으로 영원히 멈추진 않기에 우리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새 사회를 만들려 하는 손길과 삽질을 멈추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아니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내리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이것은 이 시가 경고하는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넘어선 것으로 환각에 빠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종을 울려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페허 속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주민 국회의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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