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노래라는 건 쓸모없는 것에 가깝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일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쓸모있는 것들로만 채워진다면 그것 또한 괴로운 일이다/ 여전히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곳엔 많다”(김제형 ‘노래의 의미’ 중에서)
‘노래’를 ‘문화’로 바꿔도 좋겠다. 코로나19 사태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세상에서 문화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문화 덕분에 우린 버티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새삼 절감하게 한 2020년 문화계의 명암을 결산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영난이 심해진 씨지브이(CGV) 명동점이 지난 3월 영업을 중단한 모습.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세차례에 걸친 ‘코로나19 확산 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초토화된 올해 문화계를 이보다 더 잘 대변하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이 모여 감상하는 영화와 공연의 피해가 극심했다.
올해 극장 관객 수는 20년 전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지난해에 견주면 3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지난 1월만 해도 1684만명에 이르렀던 극장 월 관객 수는 코로나가 확산한 2월 737만명으로 반토막 났고, 4월에는 97만명으로 추락했다. 25일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보면, 올해 관객 수(5902만명)는 역대 최다를 기록했던 지난해(2억2667만명)의 26% 수준이다. 연말까지 더해도 6천만명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99년(5472만명)~2000년(6462만명) 관객 수준이다.
매출이 70% 넘게 떨어진 대형 멀티플렉스는 상영관 수를 줄이고 임직원 임금 반납, 희망퇴직 등을 시행하고도 버티기 힘들어지자 관람료를 1천원씩 인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 수 급감으로 <서복> <영웅> <승리호> 등 올해 기대작들이 줄줄이 내년으로 개봉을 연기하거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직행했고, 볼만한 영화가 없어진 탓에 관객 수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코로나19 사태로 결국은 문을 닫은 서울 홍대 앞 공연장 브이(V)홀의 공연 모습. 브이엔터테인먼트 제공
공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뮤지컬, 오페라, 연극, 클래식, 무용 등에서도 공연을 조기 폐막하거나 취소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지난 8월 코로나19가 재확산하면서 뮤지컬 <모차르트!>, 서울시오페라단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가 조기 폐막했고, 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수월경화>는 상연을 아예 취소했다. 최근에도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지면서 지난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앙코르 공연이 무산됐고, 이달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내한공연은 내년으로 연기됐다. 뮤지컬 <고스트> <젠틀맨스 가이드> <몬테크리스토> <호프> 등이 공연을 일시 중단했고, 국립발레단은 해마다 매진을 기록한 <호두까기인형> 서울 공연을 취소했다.
대중음악 공연과 축제 또한 연기·취소하는 일이 반복됐다.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집계를 보면, 올해 2~9월 취소된 공연만 754건이나 된다. 지난달에는 서울 홍대 앞 인디신을 대표하는 대형 공연장 브이(V)홀이 경영난을 못 이기고 폐관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미술계 역시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광주 비엔날레가 연기된 것에 더해 국공립 미술관·박물관을 중심으로 대다수 전시장이 셧다운을 반복하며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온라인 공연·영상통화 사인회…비대면으로 돌파구 찾아
코로나19 사태로 올 한해 문화계는 전례 없는 암흑기를 보냈다. 공연장과 전시관은 사실상 문을 닫았고, 극장가도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문화계는 코로나19의 위기에 멈춰 서지 않고 생존을 위한 ‘돌파구’를 찾아냈다. 올해 비대면(언택트) 문화가 새로운 표준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비대면 문화가 정착한 대표적인 부문은 가요계다. 코로나19로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대안으로 삼은 ‘랜선 콘서트’나 ‘온라인 쇼케이스’에 첨단기술이 더해지면서 온라인 공연이 하나의 장르로 우뚝 서게 됐다. 특히 케이(K)팝의 성장과 맞물려 대형 기획사 소속 아이돌이나 티켓 파워가 있는 가수를 중심으로 온라인 유료 공연을 통한 새로운 수익 모델이 만들어졌다. 그 선두에 방탄소년단(BTS)이 있었다. 이들은 지난 6월14일 팬 커뮤니티 플랫폼인 ‘위버스’를 통해 유료 온라인 콘서트인 ‘방방콘 더 라이브’를 열었는데, 동시 접속한 전세계 팬이 75만66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비대면 문화의 정착은 스타와 팬의 소통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영상통화를 이용한 팬 사인회나, 팬이 차에 탄 채 사인을 받을 수 있는 ‘드라이브스루(자동차 이동형) 사인회’가 대표적이다. 스타의 사진이나 영상 등을 이용한 ‘온라인 전시회’도 발 빠르게 확산했다.
공연계 역시 온라인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뮤지컬 <모차르트!>를 비롯해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베르테르> <엑스칼리버> 등이 유료 온라인 공연을 시도하며 코로나19 시대 온라인 공연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뮤지컬 <광염소나타>는 공연 실황을 전국 10개 도시 영화관에서 생중계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관람객이 급감하며 최악의 사태를 맞은 영화계도 예외는 아니다. 240억원 규모의 한국 최초 에스에프(SF) 대작으로 기대를 모은 <승리호>를 비롯해 <낙원의 밤> <콜> <사냥의 시간> 등이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줄줄이 넷플릭스행을 택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OTT)을 중심으로 한 지각변동이 본격화한 셈이다. 미술계도 각종 온라인 체험·전시관을 열었고, 문화재·고고학계 역시 ‘경주 쪽샘 44호분 발굴 성과 온라인 설명회’나 ‘경주 황남동 신라인 무덤 발굴 현장’ 유튜브 생중계 등을 통해 관람객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만, 이런 비대면 문화가 티켓 파워와 자본력이 풍부한 대형 기획사나 공연·영화 제작사, 박물관 등에서만 활발히 이뤄질 뿐, 중소형 기획사나 제작사, 인디밴드, 작가 등에겐 ‘그림의 떡’이란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지금 모든 콘텐츠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콘텐츠를 오티티로 시청하니 “어느 채널의 프로그램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채널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란 소리다.
올 한해 코로나로 ‘집콕’하는 사람이 늘면서 오티티, 특히 넷플릭스의 존재감이 커졌다. <승리호> <차인표> <사냥의 시간> <낙원의 밤> 등의 영화가 넷플릭스로 향했다. 넷플릭스의 한국 유료 가입자 수는 330만명(9월 기준)으로 크게 늘었다. 넷플릭스 쪽은 “전세계 유료 가입자 수는 1억9500만명인데 전 분기보다 늘어난 220만명의 46%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나왔고, 특히 한국과 일본이 성장을 견인했다”고 밝혔다. 최근 한국 최초 크리처물 <스위트홈>이 미국 내 시청 8위를 기록하는 등 넷플릭스에서 한국 콘텐츠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토종 오티티도 넷플릭스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골몰한다. 지상파 3사와 에스케이텔레콤이 함께 만든 웨이브는 출범 1년 만에 전체 회원 1천만명을 돌파했으며 영화감독들과 손잡은 <에스에프(SF)8>도 내놓았다. 왓챠도 자체 제작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극본 공모를 마쳤고, 최근 총 360억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오티티 전쟁은 내년에 더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디즈니플러스가 최근 한국 진출을 공식화하고 ‘마블 시리즈’와 ‘스타워즈 시리즈’ 등 오리지널 콘텐츠를 홍보하면서 벌써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한국 오티티 시장 규모가 2014년(1926억원)부터 연평균 26.3% 성장을 거듭해 올해는 7801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출범 당시 분식회계 등 위법 사실이 드러난 종합편성채널 <엠비엔>(MBN)에 대한 행정처분 최종 의결이 예정된 지난 10월30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방송독립시민행동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방송통신위원회에 엠비엔 승인 취소를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타블로이드 티브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종합편성채널(종편)을 둘러싼 잡음은 올해도 끊이지 않았다. 막말·왜곡·편파 보도를 일삼는 것을 넘어 검·언 유착, 자본금 불법 충당 등 불법을 저지른 종편들이 줄줄이 ‘조건부 재승인’을 받으면서 또다시 재승인 제도의 실효성에 관한 논란이 일었다.
특히 <엠비엔>(MBN)은 출범 당시 자본금을 불법 충당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으로 인해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로부터 ‘6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출범 자체가 불법이므로 승인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언론단체들은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비판했다. 더욱이 영업정지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 도래한 재승인 심사에서도 ‘조건부 재승인’을 받아 방통위가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거셌다.
<채널에이(A)>는 취재기자가 현직 검사장과의 친분을 내세워 여권 인사의 비위를 털어놓으라고 취재원을 겁박했다는 ‘검·언 유착’ 의혹으로 언론사로서는 31년 만에 압수수색을 당한 데 이어 연루된 기자는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저널리즘 윤리를 저버렸다”는 비판에도 방통위는 <채널에이>에 대해 수사 결과 등을 통해 방송의 공적 책임, 공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드러날 경우 재승인을 취소하는 ‘철회권 유보’를 조건으로 재승인을 의결했다.
<티브이 조선> 역시 재승인 심사에서 ‘공적 책임, 공정성’ 부문이 기준점수에 미달했으나 ‘매년 오보·막말·편파 방송 관련 법정제재를 5건 이하로 유지할 것’ 등을 조건으로 3년 연장 결정을 받았다. 이 방송은 객관성 위반 등의 사유로 이미 올해 법정제재가 6건에 달했으나 일부에 대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최종 판결까지는 제재 건수에서 제외되는 맹점을 악용한 것으로, 재승인 조건 부과에 대한 실효성 논란마저 일고 있다. 내년이면 ‘개국 10년’을 맞는 종편을 둘러싸고 “방송의 품격을 올릴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방송정책의 새 틀을 짜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높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