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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주엔

‘평화의 섬’ 제주, 그리고 ‘다크 투어리즘’

등록 2017-03-29 15:23수정 2017-03-29 16:55

[제주&]제주 바람과 돌은 안다, 모진 고통의 역사

태평양 전쟁 등 일제의 흔적부터
제주도민 학살당한 4·3사건까지
섬 곳곳에 역사의 현장 고스란히

아름다운 풍광 못지않은 감회
‘평화의 섬’ 의미 찾는 발길 늘어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 폭격용으로 사용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알뜨르비행장 유적지. 앞에 고분군처럼 늘어선 것은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 유적이다. 비행장 뒤로 산방산과 한라산이 보인다. 서귀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 폭격용으로 사용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알뜨르비행장 유적지. 앞에 고분군처럼 늘어선 것은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 유적이다. 비행장 뒤로 산방산과 한라산이 보인다. 서귀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3월12일 오후 제주도 서남부에 있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옛 알뜨르비행장 주변은 감자 농사가 한창이었다. 이 지역 농민들이 트랙터를 이용해 밭을 갈거나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밭과 밭 사이에 듬성듬성 피어난 노란 유채꽃과 주변의 푸른 풀들이 추운 겨울을 털고 기지개를 켜는 제주의 봄을 알렸다. 일제가 만든 벙커 진지 위에 오르자 100여만평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펼쳐졌다. 밭으로 사용하는 들판 군데군데 일제 강점기 때 건설한 격납고들이 장엄하게 눈에 들어오고 산방산이 손에 잡힐 듯 자리했다. 그 뒤로 장대한 한라산이 병풍처럼 알뜨르비행장 일대를 품고 있었다. 그 옆으로 송악산이 우뚝 솟고, 가파도와 국토 최남단 마라도가 저 먼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었다.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 일대는 제주올레 10코스(화순 금모래해변~모슬포)가 지나는 곳이다. ‘뜨르’는 제주어로 ‘넓은 평야’를, ‘알’은 ‘아래’라는 뜻이다. ‘알뜨르’는 모슬봉 아래 위치한 데서 유래한다. 일본해군이 1931년 건설한 알뜨르비행장은 1945년 종전 때까지 약 15년간 일본군의 주요 군사거점이었다. 부근에는 한국전쟁 시기 예비검속돼 211명이 집단학살된 섯알오름 4·3 유적지도 있다.

따뜻한 날씨 속에 올레꾼들이 혼자서 또는 둘이서 걷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섯알오름 4·3 유적지 부근을 지나던 박래성(51·경기 성남시 분당구)씨는 이날 혼자서 제주올레 10코스를 걷기 위해 당일치기 제주여행에 나섰다고 했다.

박씨는 “제주에 이런 숨은 역사유적지들이 있는지 몰랐다. 책에서만 봤던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며 걷는 게 너무 좋다”고 소감을 말했다. 박씨는 “송악산 해안절벽에 뜻밖에 일본군 전쟁유적지인 인공동굴(갱도 진지)도 있었다”며 “좋은 카페도 있고 경치도 빼어나 다음에 또 찾을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본군 지하벙커.                                                  서귀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본군 지하벙커. 서귀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평화의 섬’ 제주가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은 단순히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죽음이나 고통, 참상 등이 일어났던 지역을 여행하며 깨달음을 얻는 여행이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학살당한 중국 난징대학살 기념관,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알려준 체르노빌 구소련 핵발전소 부근 등은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지역이다.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가 관광지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이도 있겠지만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현장학습을 통해 나치의 만행을 생생히 깨닫고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며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다크 투어리즘의 본질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이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은 체르노빌의 기억, 후쿠시마의 기억을 미래에 계승하기 위해 ‘잊지 말자’고 강변하는 것 외에 무엇이 가능하냐는 물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 공간에서 일어난 슬픔은 그곳에 가야만 생생히 느낄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제주의 근현대사는 고통으로 점철됐다. 중일전쟁 시기 일제는 제주도를 대중국 폭격기지로 활용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최후 거점으로 삼아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제주도를 요새화했다. 해방 이후 일어난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인 제주4·3사건 때는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가 희생됐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중국군 포로수용소가 있었으며, 대정읍 육군 제1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연인원 50만여명의 청년이 전선으로 나갔다. 대정읍에는 아직도 당시 지휘소, 의무대 건물, 제1 훈련소 정문 기둥과 강병 대 교회, 공군사관학교 훈적비 등이 남아 있다.

제주도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일본군 군사시설을 비롯해 해방 이후 일어난 제주4·3사건 유적지,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군사시설 등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을 볼 수 있는 역사현장이 곳곳에 있다. 이런 현장들은 대부분 제주의 빼어난 절경과 함께해 감회를 더한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돼 211명이 집단학살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 섯알오름은 제주올레 10코스에 자리잡고 있어 올레꾼들이 자연스럽게 4·3 사건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서귀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돼 211명이 집단학살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 섯알오름은 제주올레 10코스에 자리잡고 있어 올레꾼들이 자연스럽게 4·3 사건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서귀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부는 지난 2007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 정부는 ‘평화의 섬’ 지정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해방 이후 일어난 제주4·3사건의 폐허를 딛고 일어난 제주 사람들의 의지와 화해·상생의 정신을 평화의 개념 속에 담았다.

최근에는 제주4·3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평화공원을 찾는 발길도 부쩍 늘었다. 지난 10일 4·3기념관에서 만난 변정은(32·여·제주시) 씨는 “제주에 살면서도 다른 전시회를 보러왔다가 이번에 처음 기념관을 둘러봤다”며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됐고 역사와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기념관 출구에 있는 소원지 나무에 걸려있는 소원지의 글귀도 눈에 띄었다.

“교과서에는 4·3사건이라고 짧게 쓰여 있어서 어떤 사건인지도 잘 모른 채로 넘겼는데, 수능을 치르고 이곳에 와보니 저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웠습니다. 외워지지 않는다고 알아보지 않으려고 했던 태도를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곳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2016년 12월9일 전남 순천 한 여고생)

“4·3사건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겠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없도록 간절히 기원합니다.”

박찬식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은 “사람들에게 제주도가 ‘아름다운 섬’, ‘세계자연유산의 섬’으로 알려졌지만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다크 투어리즘 체험을 통해 평화와 인권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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