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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주엔

슬픈 현대사 간직한 가시마을 4·3길…350가구 중 250가구 불타

등록 2018-05-09 16:05수정 2018-05-09 16:09

[제주&] 가시마을 4·3길을 걷다

4·3 사건 때 400여 명 넘는 주민 희생돼
아픈 어제 딛고 역사문화 마을로 거듭나
가시리 주민들이 마을 복구와 고향 발전에 기여한 재일동포 고당 안재호 선생 동상과 재일동포들의 공적비.
가시리 주민들이 마을 복구와 고향 발전에 기여한 재일동포 고당 안재호 선생 동상과 재일동포들의 공적비.
“1948년 11월15일 새벽,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가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방화하기 시작했어요. 모든 집이 초가여서 불을 붙이자 훨훨 타올랐어요.”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만난 오태경(87)씨는 70년 전 4·3 당시 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인 양 생생하게 말했다. 이날 하루에만 30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이들 가운데 10살 미만은 8명, 노인은 11명이었다. 전체 350여 가구 가운데 70%가 넘는 250여 가구가 불에 탔다. 며칠 뒤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집들도 불에 타 초토화됐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해안마을로 내려가거나 산속으로 피난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인근 해안마을인 표선리로 피난 간 주민들은 표선초등학교에 수용됐다. 12월22일 이들 가운데 76명의 가시리 주민들이 집단학살됐다. 가족 중에서 청·장년이 빠진 탓에 이른바 ‘도피자 가족’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다음날에는 16명이 처형되는 등 이틀 동안 92명이 희생됐다.

마을이 잿더미로 변한 뒤 가시리 주민들의 삶은 신산했다. 1949년 5월부터 마을 복구가 허락되자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이 마을 출신으로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실업가인 안재호 선생 등이 마을 재건을 위해 애를 썼다. 가시리 사무소 앞에는 마을 재건과 고향 발전에 헌신했던 안재호 선생의 동상과 안흥규 선생 등 재일동포의 공헌비가 서 있다. 제주도 내에서 마을의 발전을 위해 동상을 세운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당시만 해도 제주에서도 산골에 속했던 가시리에서는 주민 1600여 명 가운데 400여 명 이상이 4·3 때 희생됐다. 제주시 노항리(지금의 노형동)와 북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인명 피해가 큰 마을이다.

지난해 주민들이 ‘가시마을 4·3길’을 만들었다. 4·3 당시 주민들이 겪은 역사 현장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역사문화 마을로 발돋움하는 지금의 가시리는 넓은 도로가 뚫리고 개발돼 70년 전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졌다. 하지만 4·3의 역사를 생각하며 걸으면 마을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난다.

고야동산
고야동산
길은 가시리 ‘4·3길센터’ 주변 가시리 본동 4·3성터에서 시작한다. 4·3 당시 마을이 초토화된 뒤 주민들을 동원해 돌로 쌓은 성담이다. 이어서 만나는 지점은 고야동산이다. 도로 확장으로 동산의 모습이 변했지만 형태는 남아 있다. 4·3 당시 이곳은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마을 진입을 사전에 파악해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청년들이 보초를 섰던 곳이지만, 마을 인근에 피신했던 주민 30여 명이 집단학살된 곳이기도 하다.

600여 년 전 가시리를 만든 청주 한씨 한천과 그 아들의 묘가 있는 ‘한씨 방묘’와 주민들이 제를 지내는 ‘구석물당’, 1879년 제주에 유배 왔던 면암 최익현이 한천의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준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를 지나면 마두릿동산이 있다. 이곳도 4·3 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를 섰던 곳이다. 4·3 때 고야동산에 세운 깃대를 내리면 마두릿동산에서 보고, 다시 마을 주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두릿동산을 지나면 4·3 당시 10여 가구가 살았던 ‘종서물’을 만난다. 이곳은 당시 소개된 뒤 복구되지 않은 채 농경지로 변해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가시리 가시천 동쪽에 있던 ‘새가름’도 초토화된 뒤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된 곳이다. 20여 가구 100여 명이 살았던 새가름은 4·3의 전개 과정에서 25명이 희생되는 등 많은 인명 피해가 난 곳이다. 이곳에는 지난 2002년 4월 제주도가 세운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있다.

가시천을 지나 처음 출발했던 4·3길 센터로 돌아올 수 있다. 가시마을의 4·3 역사를 더 알고 싶고, 더 걷고 싶다면 수풀이 우거지고 다양한 야생초가 뒤덮은 갑선이오름과 달랭이모루까지 걸으면 좋다. 달랭이모루에서도 가시리가 처음 초토화되던 1948년 11월15일 마을 주민 12명이 피신했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돼 총살당했다.

지금의 가시리는 그때와 다르다. 마을은 역사문화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4·3을 직접 겪었고, 8살 위의 형도 그때 산으로 피신했다가 행방불명된 오씨는 마을의 4·3 해설사로 활동한다. 오씨는 “가시리만큼 탄압이 심한 곳이 없었다. 왜 그렇게 많은 가시리 사람들이 죽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산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기도 하고, 살기 위해 내려갔다가 죽기도 했다.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죽일 수는 없다”며 “최근에도 국내는 물론 외국의 학생들까지 가시리를 찾아와 4·3 역사를 설명한 적이 있다. 청년들이 4·3 역사를 이해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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