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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선진국’ 대한민국주의…낡은 깃발 꽂는 한국식 할리우드 영화

등록 2023-08-05 09:00수정 2023-08-05 10:55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더 문, 비공식작전, 밀수
‘더 문’. CJ E&M 제공
‘더 문’. CJ E&M 제공

현대자동차 쏘나타 디 엣지 광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미 있던 땅에 깃발을 꽂은 순간 신대륙이 되었고, 익숙한 방식을 벗어날 때 새로운 작품이 되었지.” 당황스러운 카피다. “깃발을 꽂았다”는 말로 묘사되는 침략 과정에서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의 80%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문명이 절멸했고, 그들의 후손은 오랜 세월 ‘미개한 인디언’으로 낙인찍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됐다. 제국주의 침탈과 살상의 역사를 도전과 혁신의 이미지로 소환한다니, 이 무지는 유죄다.

하지만 이는 비단 쏘나타 광고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사회 자체가 제국주의가 짓밟은 존재들의 피를 빨아먹고서야 가능했던 ‘선진국’의 의미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채 스스로 선진국이 되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케이(K) 컬처, 케이 데모크라시, 케이 방역 등 이니셜 케이가 만들어낸 온갖 판타지 속에서 스스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흐뭇해하고 있다. 제국주의자와 동일시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저런 카피는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드디어 선진국’이라는 감각은 최근 몇년간 제작된 한국 상업영화에서도 발견된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영화산업이 품어온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꿈,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제국의 영화, 즉 할리우드 영화가 되겠다’는 기이한 꿈이 비로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2023년 여름 성수기를 맞아 개봉한 ‘더 문’(감독 김용화), ‘비공식작전’(김성훈), 그리고 ‘밀수’(류승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3세계’ 야만적 공간으로

‘더 문’에도 ‘깃발’의 은유가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은 2029년. 대한민국 자체 제작을 자랑하는 달 탐사선 우리호가 달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지만 이내 태양 흑점 폭발로 난파당하고, 세명의 우주대원 중 황선우(도경수)만 살아남는다. 그렇게 “달에 홀로 고립된 대한민국 우주대원”을 구조하기 위해 항공우주센터와 여타 관계자들이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여러 난관 속에서도 황선우는 달에 착륙해 월면을 달리고,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달에 깃발을 꽂은” 국가가 된다.

단 한명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엘리트와 국가 지도자가 움직이고, 국제적인 공조를 이끌어내는 일, 심지어 그 과정을 우주적인 스케일로 확장시키는 상상력은 한국인이 스스로의 위상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한국 영화가 어느 정도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갖추었는가와 연관돼 있다. ‘더 문’은 이런 작업을 꽤 그럴듯하게 해냈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에 미국주의가 공기처럼 녹아 있듯이 ‘더 문’에도 대한민국주의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런데 ‘더 문’의 대한민국주의는 가족주의와 부계혈통주의를 씨실과 날실로 삼는다.(이조차 할리우드와 닮았다.) 위대한 우주대원들은 오로지 아버지이거나 아들로만 상상되고, 주요 인물들은 결혼계약으로 얽혀 있다. 게다가 황선우는 5년 전 아버지 황규태(이성민)가 실패한 프로젝트를 끝내 성공시키면서, 국가의 이름을 세우는 것과 아버지의 이름을 복원하는 것이 하나의 과업임을 드러낸다. 영화는 공들인 스펙터클과 도경수라는 빛나는 배우를 남겼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상상력을 핵가족 네트워크 안에 가두면서 한없이 고리타분해진다.

‘비공식작전’. ㈜쇼박스 제공
‘비공식작전’. ㈜쇼박스 제공

그렇다면 ‘비공식작전’은 어땠을까? 최근 한국 영화에는 ‘선진 대한민국’이라는 시대정신 안에서 국외 로케이션물이 등장하고 있다. 1991년을 배경으로 내전으로 고립된 아프리카 도시를 탈출하는 남북 외교관들의 이야기 ‘모가디슈’(2021)나 2007년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피랍 사건을 다룬 ‘교섭’(2023) 등이 그런 영화들이고, 1987년 베이루트에서 펼쳐진 외교관 구출 작전을 모티프로 하는 ‘비공식작전’은 이와 궤를 함께한다. 이런 국외 로케물들은 대한민국이 독재를 벗어나 그저 먹고사는 것을 넘어 선진국의 꿈을 품기 시작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근대적 국가 시스템이 부재하는 제3세계, 그 야만의 공간으로 진입한다. 물론 이 영화들에서 한국의 관료제는 여전히 무능하고 비정하지만, ‘엘리트 시민’은 그 한계를 기어코 돌파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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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고만고만한 ‘한국 영화 얼굴’

이런 상상력이 최대치로 펼쳐졌던 건 ‘범죄도시2’에서였다. ‘범죄도시1’에서 조선족을 ‘착한 조선족’과 ‘나쁜 조선족’으로 갈라쳐 통치했던 마석도(마동석)는 이제 (미국의 액션영웅이 이 나라 저 나라를 쑤시고 다니듯이) 베트남에 난입해서 그곳의 법을 무력화하고 한국의 법을 집행했다. 나의 지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야말로 제국”이라고 답했다. 한국 남자는 더 이상 식민지와 내전의 기억에 짓눌린 “민족의 알레고리”(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가 아니며, 온전한 개인이자 보편인간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런 상상력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건 대한민국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이나 한국 영화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꿈을 실현하는 가운데 한국 영화가 너무 낡아버린 것도 사실이다. 산업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투기성은 점점 짙어졌다. ‘대박’ 아니면 ‘쪽박’인 산업 구조 안에서 한국 상업영화는 안전한 선택에 기대어 이미 검증된 길을 가려고 한다. ‘더 문’에서는 익숙한 가족주의와 대한민국주의가, ‘비공식작전’에서는 남성 투톱 버디무비라는 장르와 하정우식 남성영웅주의가 그런 안전한 선택이었다.

‘밀수’. ㈜NEW 제공
‘밀수’. ㈜NEW 제공

그나마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했던 ‘밀수’에서는 김혜수·염정아 캐스팅과 고민시의 캐릭터가 그랬다. 순 제작비 180억원이 들어가는 영화에서 해녀가 주인공이라니. 그건 제작자로서는 이미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다른 남성 영화가 송강호·황정민·이병헌 등에 기대듯 김혜수·염정아에게 기댔다. 그러다 보니 한국 영화의 얼굴은 20년째 고만고만하고, 여자고 남자고 40~50대 배우들이 여전히 모든 스펙트럼의 인간군상을 커버한다. 그나마 유일하게 새로운 얼굴인 고민시에게는 한국 영화가 수천번은 우려먹은 마담 캐릭터를 입혀버렸다.

한국 상업영화의 전반적인 고전이 제작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역시 낡은 영화를 원하는 낡은 관객이니까. 이렇게 낡아버린 한국 상업영화에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을까? 우리가 “깃발을 꽂는” 제국의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꿈꿀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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