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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1987년을 정면으로 마주보다

등록 2017-12-14 18:32수정 2017-12-15 17:17

1987

무려 30년. 폭력과 야만이 들끓던, 그러나 그에 맞선 민주화의 열기는 더 뜨겁던 ‘1987년’을 영화가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이한열 사망사건으로 정점을 찍은 ‘87년 6월 항쟁’의 장엄한 역사가 긴 시간을 돌아 스크린에서 되살아난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1987>은 시대의 부름에 당당히 응했던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불의에 대항해 쟁취한 승리의 경험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영화다.

1987년 1월, 22살 대학생 박종철(여진구)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은 사망 당일 화장을 지시하지만, 당직인 최 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요구한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파렴치한 변명으로 일관하던 경찰은 언론이 ‘물고문 도중 질식사’라는 사실을 밝혀내자 말단 두 명만 구속해 꼬리를 자르려 한다. 그러나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이 조카 연희(김태리)를 통해 조작 사실을 폭로하는 옥중서신을 외부로 전하면서 대학가에 시위가 들불처럼 번진다.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민주화운동은 대학가를 넘어 온 나라로 확산한다.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리얼리티에 있다. 장준환 감독은 고문치사를 은폐하려는 독재정부와 이를 파헤치려는 양심세력과의 대결을 촘촘하고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그 전개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듯 박진감 넘친다. 더불어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장면, 대학가 시위장면, 백골단 진압장면 등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사건 관계자들의 실명까지 자막으로 넣어줌으로써 마치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마이마이, 선데이서울, 티브이가이드 등 80년대를 소환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리얼리티를 높이는 데 한 몫을 한다.

영화 <1987>의 한 장면. 씨제이이앤엠 제공
영화 <1987>의 한 장면. 씨제이이앤엠 제공

30년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사건 관계자들 실명 자막 넣고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장면 등
다큐멘터리 보듯 사실적 묘사

스릴러 보듯 박진감 넘치지만
시대의 ‘진정성’ 뚝심있게 일관
상업영화치곤 지나치게 무거워

<1987>은 다른 영화와 달리 주인공이 수없이 많다. 법대로 하라며 시신 화장을 거부한 검사, 용기를 내 고문 사실을 기자에게 털어놓는 의사, 양심적인 부검보고서를 작성하는 국과수 부검의, 사명감에 불타 진실을 좇는 기자, 목숨을 걸고 조작 사실이 담긴 편지를 전하는 교도관…. 이들의 노력이 하나가 돼 거대한 진실이 눈앞에 드러날 때, 평범한 대학생 연희는 이 흐름에 동화된다. “그날 같은 건 절대 오지 않는다. 꿈 깨고 정신 차려라”고 말하던 연희가 시민들과 함께 버스에 올라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 인파를 바라보는 장면에선 소름 돋는 전율이 밀려온다. “1987년에 땀 흘리고 피 흘렸던 분들의 이야기,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 해의 가치와 의미를 담고 싶었다”는 장준환 감독의 바람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난다.

배우들의 연기도 누구 하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특히 진실을 찾는 자들의 대척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장악해 끌고 가는 김윤석의 연기는 압권이다. 투박하지만 서늘한 평안도 사투리,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날카로운 눈빛, 주변을 압도하는 무게감 있는 움직임은 ‘시대의 폭압성’을 완벽하게 대변한다. 유일한 허구적 인물인 연희 역을 맡은 김태리도 신예라는 말로는 부족한 존재감과 연기력을 뽐낸다.

감독은 시대에 대한 진정성과 의무감을 흥행코드와 맞바꾸는 흔한 타협을 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묵직하게 극을 밀고 나가는 뚝심이 빛난다. 다만, 이 때문에 상업영화치고는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정우가 재기발랄한 언어유희와 유머를 구사하며 홀로 분투하지만 무게감을 상쇄하기엔 부족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낸 관객에겐 딱 적당한 정도의 무게일지라도 박종철·이한열의 이름조차 생경한 젊은 관객에겐 다소 버겁지 않을까.

“우리한테 남은 마지막 무기는 ‘진실’이다. 그 진실이 이 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다.” 영화 속 이 대사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낯설지가 않다. 마치 30년 전의 거울로 현재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2017년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영화 <1987>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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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그린 첫 영화 ‘1987’ …시사회 관람 당시 주역들 “심장 떨린다”

영화 실제주인공들 시사회 관람
고문·장례 장면서 “아이고” 탄식

“와~영화 잘 만들었네!“

27일 개봉하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사망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기자가 취재 현장 접근을 막는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27일 개봉하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사망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분투하는 기자가 취재 현장 접근을 막는 전경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앤드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무겁지만 따뜻한 공감이 영화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외친 한 마디에 관람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뜨거웠던 1987년의 역사를 만든 숨은 주역들은, 스크린을 통해 30년 전의 자신과 마주한 경험을 그렇게 자축했다.

13일 저녁 씨지브이(CGV) 용산 아이파크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6월 민주항쟁’에 불을 붙인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의 실제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를 관람하는 시사회가 마련된 것이다. “영화로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됐어요. 세상이 달라져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니 종철이도 기뻐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려질까 궁금하네요.” 시사 전 만난 박종철의 형 박종부(60)씨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제작사가 마련한 대기실에서 ‘나를 연기해 준 배우’와 짝을 이뤄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던 모습은 싹 잊은 듯 영화가 시작하자 관람석엔 긴장감이 흘렀다. 박종철 고문 장면과 이한열 죽음 장면에서는 “아이고”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박종철의 아버지가 아들의 유골을 강에 뿌리며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는 말하는 장면에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졌다.

영화를 관람한 실제 주인공들은 “영화적 각색은 일부 있지만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게 잘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박종부씨는 “적당한 긴장감도 팩트도 잘 조합된 것 같다”며 “다만, 시간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일부 검찰이 은폐에 가담한 사실이 생략돼 아쉽긴 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영화 시나리오 단계부터 제작사·감독과 소통했지만 아직도 동생의 고문과 사망장면을 보니 심장이 떨린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영화를 못 보실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조작 사실을 폭로한 이부영의 옥중서신을 외부에 전한 교도관 한재동(70)씨는 “실제로도 긴박했지만 살을 붙여 영화로 만드니 재밌고 실감 났다. 유해진씨가 연기는 참 잘하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영화와 달리 저는 고문을 당하진 않았다. 붙잡혔으면 죽었을 수도 있는데, 운이 좋았다”고 했다.

의사 오연상(60)씨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왕진을 나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목격자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기자에게 사실을 전한 용기있는 분’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앞뒤 재거나 계산하면 어려웠겠지만, 당시엔 그 사건이 옳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용기와는 좀 다르죠.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일 뿐.” 오씨는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영화의 주제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모든 게 협력해 선을 이룬다고 하잖아요. 이 사건은 하늘마저도 도왔죠. 하나의 목적을 향해 모두가 힘을 합쳐 파헤친 진실이라는 점이 영화에 잘 드러나 좋았습니다.”

당시 박종철의 시신 화장을 거부하고 부검을 요구했던 검사 최환(74)씨는 ”영화는 사실 묘사가 참 잘 됐는데, 나와 극 중 하정우의 캐릭터가 너무 다르다”고 투덜댔다. “하정우는 업무 중에 막 술을 먹고 발길질도 하는 터프가이로 나오는데, 실제로 난 조용한 사람이요. 그게 영~마음에 걸리네. 하하하.”

실제 주인공들의 공통된 바람은 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동생의 죽음은 우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지만, 한편으론 역사를 바꾸는 데 기여했어요. 한 700만~1000만은 들었으면 해요. 젊은 친구들도 영화를 보며 촛불혁명이 우연이 아닌, 87년의 연장이라는 것을 기억하길 바라요. 행동하는 양심의 소중함도 깨달으면 좋겠고요. 그게 종철이가 바라는 거 아닐까요?”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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