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첼리스트 최하영은 “관객들과 깊이 있게 소통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Gata Rosa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보통 깐깐한 대회가 아니다. 2주면 끝나는 다른 국제 콩쿠르와 달리 한달 가까이 이어진다. 결선 참가자들은 주최 쪽이 지정한 새로 창작된 협주곡을 연주해야 하는데, 이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낯선 악보를 처음 받아든 결선 진출자 12명은 ‘퀸 엘리자베스 뮤직 샤펠’이란 궁에 사실상 감금된 채 연습에 매진한다. 주어진 시간은 딱 1주일. 외부 조력을 얻지 못하도록 휴대전화 사용도 제한한다. 첼리스트 최하영(24)은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난 6월5일 끝난 올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첫 국내 투어를 앞둔 그를 지난 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생각을 비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려 놀랐어요.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우승을 실감했습니다.” 그는 “벨기에에선 가게나 식당에 들러도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워해준다”며 “우승 이후 다양한 음악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생겨 좋다”고 말했다. 여러 레이블과 음반 녹음도 협의 중이다. 그는 “피아노와 함께하는 듀오 음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이후 첫 국내 투어 공연에 나서는 첼리스트 최하영. ⓒAndreas Malkmus
이 콩쿠르는 한국과 유독 인연이 깊다. 2011년 성악 부문에서 소프라노 홍혜란이 우승한 이후 소프라노 황수미(2014), 바이올린 임지영(2015)이 우승을 차지했다. 올해 결선 진출자 12명 가운데 4명이 한국인이었다. 해마다 벨기에에서 여는 이 대회는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성악 등 4개 분야를 번갈아가며 경연을 펼친다.
최하영은 인터뷰 자리에 하얀 케이스의 첼로를 들고나왔다. 이탈리아 사람 니콜라 베르곤치가 19세기에 제작한 악기라고 했다. “이번 콩쿠르에 참여하면서 대여받아 쓰게 됐어요. 현대곡을 연주하는 데 적합한 악기죠.” 결선에서 그가 연주한 협주곡 2곡 모두 현대곡이었다. 오는 14일 부산을 시작으로 21일 서울까지 이어가는 7차례 국내 투어 공연에서 그는 하이든과 드보르자크의 협주곡,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한 루토스와프스키의 협주곡 등을 두루 연주한다.
“기능적인 첼리스트보다 관객들과 깊이 있게 소통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첼로가 지닌 여러가지 감성을 깊이 있고, 진정성 있게 전달하는 뮤지션으로 기억되면 좋겠고요.” 그는 “관객들이 ‘진심이 전달돼 감동했다’고 할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어머니가 취미로 첼로를 연주한 덕분에 일찍 첼로 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에 무용과 태권도를 배운 덕분인지 연주 동작이 춤을 추듯 자연스럽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고 했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다녔고, 영국 퍼셀 음악학교와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를 거쳐 현재 베를린예술대에 재학 중이다. 특히 크론베르크 아카데미는 여러 거장의 숨결을 접하며 영감을 얻는 특별한 기회였다.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피아노와 지휘를 겸하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등 걸출한 연주자들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시프 선생님은 그냥 레슨만 하는 게 아니라 밥도 같이 먹으면서 인생관, 음악관을 들려주셨죠.” 그는 “‘마스터 클래스’ 대신 ‘다이얼로그’라고 하면서 대화하듯 토론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 기돈 크레머 선생님 수업도 인상적이었다”며 “이분들 덕분에 제 나름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준결선에서 연주하는 첼리스트 최하영. ⓒThomas Leonard
올해 하반기엔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왕립학교에 입학한다. 여러 유명 학교에 다녔고 세계적인 콩쿠르에서도 우승했는데, 굳이 또 다른 학교에 입학하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배우고 공부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다”면서도 “아직 다른 콩쿠르에 나갈 생각은 없다”며 웃었다. 그가 배우려는 게 연주 테크닉만은 아닌 모양이다. “이반 모니게티 선생님에게 배우기 위해 이 학교를 선택했어요. 이분은 음악뿐만 아니라 시와 자서전 등 여러 분야의 독서를 강조해요. 어느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와 배경까지 연구하도록 하죠.”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고 했다. 한국 책은 물론, 영어와 독일어로 된 책도 두루 읽는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공부하고 있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단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전시회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요즘은 재즈 드럼에 빠져 있어요. 재즈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뮤지컬에 아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을 만큼 노래도 곧잘 하는 편이다. “이달 말엔 라트비아 작곡가 바스크스의 ‘프레즌스’라는 곡을 벨기에 음악축제에서 연주해요. 이 곡의 마지막 1분에서 연주자가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노래 연습 할 일이 걱정이군요.(웃음)”
어느 경지에 오른 첼리스트에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이 숙제이자 도전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저도 언젠가는 그 곡을 연주하고 녹음도 하고 싶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그러면서 “내년에 캐나다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가운데 몇곡과 현대곡들을 섞어서 연주하는 공연이 잡혀 있다”고 했다. 바흐란 ‘고지’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셈이다. 오는 12월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손정범과 듀오로 브리튼과 멘델스존,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를 연주한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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