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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불꽃과 물꽃은 하나다

등록 2016-12-02 19:24수정 2016-12-02 20:09

[토요판]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아침이슬’ 깊이읽기 2
아침이슬  작사·곡 김민기 노래 김민기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지난 회의 글에서 아침이슬의 시간이 ‘표면적으로’ 직선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독교적이라고도 했다. 그렇다. 아침이슬에서 밤은 표면적으로는 반복되지 않는다. 밤은 길지만 새벽이 오고 아침으로 이어져 결국 한낮에 이른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작은 미소’로 상징되는 정다운 연대, 소박한 일상적 나눔으로 아침이슬의 1부가 끝난다. 만일 아침이슬의 드라마가 ‘작은 미소’의 낙천성에 안주하면서 끝났다면 싱거웠을 것이다. ‘작은 미소’의 성취로 1부가 완성되고 갈등이 드러나는 2부가 시작된다. ‘긴 밤 지새우’는 동안 겪었던 시련을 한낮에 다시 만나게 되는 2부에서, ‘아침이슬’의 드라마는 엄청난 긴박감을 내뿜는다.

밤의 ‘설움’이 아침이슬로 맺혔으나 그 잠깐의 황홀은 지나간다. 아침이슬의 서늘하고 영롱한 빛은 ‘작은 미소’에 도달하지만, 이슬이 확장된 거대한 결정체, ‘태양’이라는 빛의 블랙홀을 만난다. 이 대목에서 ‘물’은 ‘불’에 직면하게 된다. 매우 극적이고 흥미롭다. 물의 작은 미소가 불의 묘지인 태양이 된다. 태양은 ‘찌는 더위’를 야기시키고 밤의 시련은 다시 찾아온다. ‘태양’이 붉게 타오르면서 ‘동산’은 ‘묘지’가 된다.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화자는 어느덧 묘지를 걷는다. ‘아침이슬’에서 태양은 ‘생명의 원천인 빛과 에너지’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수직으로 찍어 누르는 신, 아버지다. 197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태양-부성이 ‘작은 미소’를 지닌 아침이슬을 증발시키려던 시대.

화자는 태양을, 아버지를 거부한다. 말라비틀어지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아침이슬에는 이처럼 상징적이고 은밀하게, 서정적 표면의 이면에 부친 살해의 욕망을 숨겨 놓고 있다. 화자는 아버지의 밝은 세계, 공식적인 세계를 거부하고 ‘광야’로 간다. 광야는 ‘거칠다’. ‘한낮’인데 ‘긴 밤’과 동일하다. 아버지가 채찍질하는 시간, 정오에 이르러 다시 밤이 찾아온다. 그래서 광야다. 일제시대가 ‘긴 밤’의 시대였다면 유신시대는 ‘한낮’의 시대다. ‘정오라는 밤’의 시대다. 랭보의 시에 나오듯 ‘깨어보니 정오였다’. 정오는 이성과 논리의 억압이다. 장발 단속이다. 그렇다면 이 싸움은 아침과 정오의 싸움이 된다. 이 대결이 ‘아침이슬’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낸다.

아침이슬은 이슬이 맺히고 다시 증발하는 ‘골든타임’을 노래로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은 물의 벽에 갖혀 이슬이 되었고 한낮이 되어 사라졌다. 두꺼운 철판 속에서 얼마나 긴 밤이 지나갔을까. 긴 밤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지난 토요일에는 서울에서만 150만명이 모였고, 이번 토요일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즉각 퇴진’의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기득권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모일까. 미국에서는 트럼프라는 괴물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의 소수자들은 얼마나 더 두려움에 떨어야 할까. 총을 함부로 가지고 다니는 것을 ‘미국적 전통’이자 ‘헌법에 명시된 권리’라고 떠드는 백인 대통령을 백인들이 똘똘 뭉쳐 지지했다. 케이케이케이(KKK)의 습격을 두려워했던 그 무시무시한 밤들. 그보다 더한 밤들이 미국의 소수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밥 딜런은 ‘블로잉 인 더 윈드’에서 ‘얼마나 더 많이 날아야 포탄은 영원히 금지될까?’라고 노래했다.

밤이 참 길다. 물이 불과 맞서는 이 싸움은 고통스럽다. 아침이슬은 ‘밤의 순환’을 노래한다. 아침이슬은 표면적으로 제시한 직선적 시간관과는 다른 순환적 시간의 흐름이 물밑에 숨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이 밤의 순환이다. 표면의 파도는 가는데 바다 밑 조류는 돌아온다. 그 조류가 사람을 익사시킨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밤은 윤곽선이 없다’고 했다. 밤은 우리의 몸이다. 밤의 지속이다.

‘아침이슬’의 멜로디는 밤의 동산을 오르는 힘들고도 완만한 경사를 따라간다. 처음에 4도(파) 음에서 시작한 노래는 6도(라)가 되었다가 다시 2도(레)로 내려간다. 한국적인 산을 오르는 발걸음과 비슷하다. 멜로디의 걸음은 오르락내리락하며 ‘태양은’에서 6도로 상승하더니 ‘더위’에서 옥타브(8도)가 된다. 노래의 산꼭대기는 ‘서러움’이다. 이 노래에서 가장 높은 10도(높은 미)의 음에 도달한다.

이 노래에서 음높이의 갑작스러운 도약은 없다. 상승은 더디고 힘겹다. 높은 곳에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 광야는 광장이다. 광장에서 아침이슬의 노래가 들려온다. 지난 주말(11월26일), 150만 촛불 앞에서 양희은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었다. 순간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30년 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시장 안에 있는 철판 순대집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다. 마지막 노래는 아침이슬이었고 모두 일어섰다. 그게 함께 불러본 첫 아침이슬이었다. 그 후로도, 아침이슬만 나오면 일어섰다. 아침이슬은 늘 끝 노래였으므로. 아침이슬을 들으면 일어나고 싶은 것은 우리 세대만의 습관일까. 아침이슬은 우리를 광장-광야로 이끈다.

물과 불이 대결하는 광야에서의 싸움, 이 정오의 결투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음양오행으로 치자면 ‘수극화’(水剋火), 상극인 물과 불의 싸움에서는 물이 이긴다. 아침이슬이 승리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태양을 나눠 갖는 일이다. 저 하늘의 태양이 혼자 빛을 가져선 안 된다. 태양은 시민 각자가 나눠 가진 작은 불의 거울이어야 한다. 광장에서, 우리는 그렇게 불을 나눠 가진 다른 사람들을 본다. 촛불은 모두로부터 타오른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갈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 자신을 태워야 하나. 광야는 촛불의 바다 위에 지속된다. 그러나 사람들이여, 태양을 나눠 가질 때, 불은 꽃이 된다. 이 작은 촛불은 예쁜 하나의 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 ‘꽃’, 불꽃이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몽상가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마지막 책 <초의 불꽃>에서 촛불과 꽃을 등치시키며 이렇게 쓴다.

성기완
성기완
“그렇게, 서로서로, 불은 꽃을 피우고 꽃은 불 밝힌다.”

꽃이 되면서 불은 물과 하나가 된다. 아침이슬은 물의 꽃, 물꽃이다. 이슬이 맺힌 촉촉한 꽃, 불꽃과 물꽃은 하나다. 작은 소망을 담아, 이번 주말에도 온 국민이 광장-광야로 모인다. 모여서 불의 꽃을 피운다.

성기완 시인·뮤지션·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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