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민생물가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격은 이미 오를 만큼 다 올랐는데, 이제 와서 뭘….”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가격 인상 움직임에 대해 19일 “민생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고, 물가 안정 기조의 안착을 저해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한 것과 관련해, 식품업계 관계자들이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라면, 김치, 햇반, 식용유, 밀가루, 과자, 아이스크림, 가정간편식 등 대부분의 품목 가격이 올 초부터 추석 연휴 이후까지 줄줄이 오른 상황에서 추 장관의 ‘경고’가 뒤늦은 감이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름 밝히길 꺼린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가격 인상 릴레이가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라 지난해부터 시작된 흐름인데, 올릴 만한 품목이 다 오른 상태에서 굳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게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그렇다고 기업이 폭등한 원부자재 값을 반영한 가격을 내리거나 인상 계획을 철회할 순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추 장관은 “부당한 가격 인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담합 등 불공정행위 여부를 소관 부처와 공정위가 합동 점검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서도 식품업계는 전형적인 ‘뒷북 발언’이자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는 “가격 인상의 이유가 ‘원부자재 가격 상승’인데, 이걸 놓고 담합을 운운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 같다”며 “기업 입장에선 추석 밥상 물가 걱정에 그나마 인상 시기를 늦춘 것인데, (정부가) 솔직히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 국민 앞에 ‘할리우드 액션’을 하는 걸로 밖엔 안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배춧값이 급등하며 포장김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배추 수급 상황이 좋지 않아 일부 대형마트에서도 포장김치 물량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18일 서울의 대형마트 포장김치 판매대. 연합뉴스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정부 차원의 실효성 있는 물가안정 대책을 내놓지는 않고 기업을 옥죄 가격 인상을 방어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구시대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대유행 사태 와중에도 한국 정부가 치밀한 방역정책으로 수습에 나서 주목을 받은 것처럼,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물가안정을 체감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는 것 아니겠냐”며 “기업들을 ‘조져서’ 가격 인상을 억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고루하고 답답하다”고 말했다.
국정감사 등을 앞둔 탓에 아직 가격 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일부 식품기업은 긴장할 수 있다는 반응도 일부 있다. 한 업체 관계자는 “아무래도 부총리가 나서 저런 얘기를 하면, 가격 인상을 최대한 억제했던 기업들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애매한 시기에 가격을 올렸다가 국감에 출석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냐”며 “수출 비중이 높아 고환율의 이득을 보는 업체의 경우엔 인상 논리가 약해질 수는 있겠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원부자재 가격 인상이 업체를 가려가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 논리로 경제 논리를 억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10월 이후 점차 물가 여건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추 장관의 전망에 대해서도 식품업계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식품업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원부자재 수입 계약 기간이 통상 6개월~1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밀가루나 팜유 등 국제 원부자재 가격이 안정된다고 해도 국내 기업들엔 올해 말까지가 엄청난 고통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며 “또한 국제 원부자재 가격 안정이라는 말 자체가 가격이 폭락한다는 게 아니라 상승곡선이 완만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정부가 기대하는 물가 하락 시기가 10월이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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