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급등으로 최근 회사채 발행시장이 얼어붙고 부동산 경기 급랭에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증권 시장의 경색까지 겹치는 등 건설사·증권사·카드사·캐피털사를 중심으로 단기자금(기업어음·단기 회사채·단기전자사채 등)조달 시장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단기자금시장에서 PF ABCP 기피 현상이 무차별하게 확산되면서, 부동산 관련 금융시장 전반으로 위험이 전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투자증권은 20일 내놓은 채권시장 리포트에서 “부동산 금융시장이 경색되는 상황에서 (춘천 레고랜드 건설사업 관련) 강원도의 PF ABCP에 대한 보증의무 불이행이 찬물을 끼얹으면서 단기자금시장의 유동성이 빠르게 말라가고 있다”며, “이 유동화증권에 매입 약정이나 매입 확약 등 신용보강을 제공한 증권사들은 자체 자금으로 이 증권을 인수해 급한 불을 끄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올해 상반기 잔액 기준 증권사가 신용을 보강(보증 제공)한 PF 유동화증권은 46조원, 건설사가 신용 보강한 것은 15조4천억원으로 전체 발행 잔액이 61조4천억원에 달한다.
부동산 PF시장은 다수의 대주(대출에 참여한 채권금융기관 모임)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지금 같은 부동산 경기 냉각과 이에 따른 단기자금시장 경색 국면에 금융 리스크가 여러 금융기관으로 확산될 수 있다. 한투증권은 “채권 만기연장 같은 조처가 필요한데, 유동성 압박을 받는 일부 대주가 만기연장 조치에 반대하고 상환을 요구하게 되면 롤오버(만기 연장)와 상환 모두 실패하면서 컨소시엄에 참여한 여러 대주 기관에 리스크가 전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단기자금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타이트해지는 경향이 있는 때인데, 가파른 금리인상에 따른 금융비용 급증에다 부동산 경기 냉각까지 겹쳐 건설사·증권사뿐만 아니라 또다른 부동산 익스포저(위험 노출액)가 있는 저축은행, 카드사, 캐피탈사 등으로 위험이 퍼져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 18일 이후 이달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건설회사 신용보강에 의한 단기 PF 유동화증권 발행잔액은 약 2조1천억원이고, 11월에는 2조8천억원까지 증가한다. 또 증권회사 신용보강에 의한 단기 PF 유동화증권 차환(만기 도래한 증권 상환자금 마련을 위한 새로운 채권 발행) 발행 예정 규모는 10월 중 6조2천억원, 11월 10조7천억원이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유동화증권 시장에 유례없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며, “아직은 증권사가 보유한 유동성으로 차환 발행 물량이 어렵게 소화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가 더 길어진다면 차환 발행 중단으로 건설사, 증권사의 신용위험이 커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레고랜드 사태로 투자심리가 악화하면서 PF 유동화증권과 회사채 시장 전반에 불안감이 커지고 자금시장 유동성이 말라붙으면서, 이 여파로 중소형 건설사와 증권사들도 자금난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고위 임원은 “자본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자금조달이 막혔다. 발행금리를 높게 내놔도 (증권·카드·캐피털사 등 제2금융권 금융채권이)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채 발행시장의 경우 발행 물량을 사려는 시장 수요가 급속하게 위축되면서, 이달 들어 지난 19일까지 회사채 발행액은 1조2362억원으로 올해 1월(8조7710억원)의 7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채권 유통시장에서 19일 무보증 3년 AA- 등급 회사채 금리는 연 5.577%(민평 기준)까지 치솟았다.
회사채 공모발행에 나서도 단기자금 시장 경색으로 대량 ‘미매각’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이달 들어 에스케이(SK)렌터카(신용등급 A)가 1.5년~2년 만기로 발행하려던 800억원 규모 회사채는 100억원어치만 팔렸고, 제이비(JB)금융지주(AA+신용등급) 역시 높은 금리를 제공했음에도 목표 모집금액 1000억원 중 620억원이 미매각됐다. 시장에 그나마 있는 수요도 한국전력채권 등 우량 공기업 채권이 싹쓸이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이 지속되자 시중은행들이 선제적인 자금조달 목적으로 은행채 발행에 마구 나서는 바람에 채권시장 수급이 더 꼬이고 있는 형국이다. 한투증권은 “은행들이 시장의 표준 발행금리보다 더 높은 발행금리 제공까지 불사하는 등 은행채 발행이 폭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채권시장 안정펀드를 가동해 캐피탈 콜(펀드 조성에 동참할 것을 요청) 방식으로 펀드 자금을 조성하려해도 이 캐피탈 콜에 응해야 할 금융회사(은행·증권 등)의 자금 사정에 여유가 충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한투증권은 “캐피탈 콜 방식의 채안펀드 자금 조성은 자금이 이쪽 주머니에서 저쪽 주머니로 옮겨질 뿐 신규 자금 공급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표면적으로 현재 단기자금시장 경색 원인은 강원도 보증채무 불이행 이후 부동산 PF 관련 채권에 대한 패닉에 가까운 기피 현상과 그에 따른 유동성 고갈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부동산 경기 냉각에 따른 부동산 PF의 신용 위험 증가가 내재해 있다. 한투증권은 “부동산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부동산 PF 관련 채권에 대한 시장 신뢰 회복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며, “매입확약 등을 제공한 증권사에 대해 부동산PF 관련 잠재 부실을 파악하고 충당금 적립과 필요시 증자 등을 유도해 PF ABCP 시장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투증권은 “채안펀드 외에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차원에서 시행된 한은의 무제한 환매조건부(RP) 채권 매입 및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대출, 증권금융 유동성 공급 같은 대책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며, “한은의 저신용등급 포함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인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도 재가동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금리인상기에 이런 시중 유동성 공급은 통화정책과 엇박자가 나는 것이긴 하지만, 단기자금시장 경색을 풀기 위해서는 금융안정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은기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도 “증권사에 유동성을 지급하고, 채권안정펀드가 일반기업 기업어음부터 매입해 단기자금시장 불안심리를 잠재워야 한다”고 말했다.
조계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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