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간 거래에서 원자재 가격 상승분이 납품단가에 반영되도록 하는 ‘납품단가 연동제’에 대해 법제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공정위는 납품단가 연동제를 법으로 강제화하기보다 자율적 확산을 독려하는 방안에 무게를 둬왔으나, 최근 여당이 법제화로 방침을 정하면서 입장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한 위원장은 14일 오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앞서) 납품단가 연동제는 자율규제를 추진해 성과를 지켜보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는데, 원자재 가격 급등이 계속 지속되고 있고 이로 인한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중소기업벤처부 등 관계기관과 협의를 통해 법제화를 추진할 적절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애초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그러나 제도 법제화는 경영계의 반대로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 9월부터 납품단가 연동제를 자율규제 방식으로 시범 운영해왔다. 정부의 신중한 태도에 변화가 생긴 건 지난 9일 국민의힘이 납품단가 연동제 법제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올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하도급 업체가 도저히 감당 못 할 지경이 돼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이를 당론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당·정이 추진하는 납품단가 연동제는 납품단가 연동 사안을 약정서에 기재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 골자다. 법률로 직접 납품단가 연동 요건이나 대상·산식 등을 결정하지 않고, 원자재 가격 변동이 커질 경우를 대비해 원청업체와 하청업체에게 납품단가 연동 관련 조항을 약정서에 포함하도록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원청업체가 소기업인 경우나 갑과 을 쌍방이 납품단가 연동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 일방적으로 갑의 위력에 의해 을이 합의에 응하는 경우에 대비한 보완 장치도 마련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갑의 위치에 있는 기업을 직권조사할 수 있는 조항이다.
한 위원장은 지난 10월 카카오 서비스 먹통 사태로 촉발된 ‘온라인 플랫폼 독과점’ 문제에 대해서는 ‘자율규제’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경쟁 압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독점 플랫폼이 혁신 노력과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도 새로운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온라인 플랫폼은 다면성, 간접 네트워크 효과 등 특수성이 있어 기존의 불공정행위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이날 언급한 제도 개선책은 온라인 플랫폼 독과점 심사지침(예규) 제정과 기업결합 심사기준(고시) 개정 등 이번 카카오 사태와 무관하게 앞서 문재인 정부 때부터 추진되어온 기존 과제들뿐이었다. 이는 법률 제·개정이 아닌 예규와 고시를 새로 만들고 고치는 수준이라 제대로 된 제재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기업집단의 공시 관련 규제도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 위원장은 “경제 규모 증가 등을 반영해 내부거래 공시기준 금액을 상향하고, 공시항목·주기도 조정하는 등 공시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공시대상 기업집단 소속 국내 회사가 50억원 이상 또는 자본금·자본총계 중 큰 금액의 5% 이상인 내부거래를 할 때 사전에 이사회 의결을 거치고 공시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