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성공시대/⑥ 햇빛촌
서울 중랑구 묵동 도깨비시장 골목에서만 14년째다. 처음 슈퍼마켓을 차렸을 적엔 호황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뒤 시장엔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설탕이나 식용유 신제품이 나오면 제조회사에선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달라고 부탁했다. 묵일슈퍼 주인 정석윤(51)씨는 “그때는 젊었다”며 웃었다. 그는 지금도 아내와 함께 아침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한다.
이태 뒤 인근지역에 이마트, 까르푸 등 대형할인점이 들어서자 매출은 내리막길을 달렸다. 4~5년 전부터는 중대형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동네시장에서 반찬이나 군것질거리를 사는 사람은 오히려 줄었다. 최근엔 둘째 딸을 대학 보내며 마이너스통장까지 만들었다. 임대계약이 끝나는 올해 5월쯤 가게를 접을까 고민도 했다. 정사장은 “햇빛촌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겠다”고 말했다.
위기에 몰린 동네 슈퍼마켓들이 ‘햇빛촌’ 간판 아래 똘똘 뭉친다. 전국 5만여 소매상들을 회원으로 둔 한국체인사업협동조합은 최근 공동 브랜드를 개발해 마케팅에 나섰다. 상점들은 옛 간판을 떼고 ‘햇빛촌’이라는 이름을 단다. 같은 상표, 같은 가격의 PB상품(자체브랜드 상품)도 판매한다. 정 사장의 묵일슈퍼는 ‘햇빛촌’ 1호다. 지난 21일 새 간판 제작에 들어갔다.
“1996년 유통 개방 때만 해도 몰랐죠. 우리가 상권의 90%를 쥐고 있는데 별일 있겠냐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슈퍼마켓과 구멍가게들이 한해 10곳 중 3곳 꼴로 문을 닫았습니다. 50평 안팎의 매장을 가진 소매점들의 타격이 가장 컸죠. 지역마다 대형 할인점 입점 반대투쟁을 치열하게 벌였지만 소득은 거의 없었습니다.”
최장동(59) 체인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유통을 맡는 전국 100여개 체인사업본부와 판매를 맡는 5만여 소매점들이 이제야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햇빛촌’ 프로젝트의 핵심은 PB상품이다. 가맹점 진열대에 따로 ‘PB존’을 만들어 중소기업들이 만든 최고 품질의 제품을 이르면 내달부터 판매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150여개 업체가 납품을 희망하고 있다. 조합은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중소기업청의 품질인증을 받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구체적인 상품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커피, 화장지, 세제 등 유통기한이 긴 것들부터 시작될 전망이다.
새 생활 체인의 박길천 이사(오른쪽)와 묵일슈퍼 주인 정석윤씨가 ‘햇빛촌’ 간판 부착과 홍보 문제를 놓고 논의하고 있다.
최 이사장은 이문을 남기기보다는 중소기업과 동네가게를 살리는 데 주력하겠다는 다짐했다. 뻥튀기 하나 들여놓는데도 엄청난 입점비를 요구하고, 전단지 광고라도 할라치면 상당한 비용분담을 요구하는 대형 할인점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5만여개 매장을 하나로 묶었으니 강력한 구매력을 갖추게 될 것은 불 보듯 당연한 일이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택배로 맡긴 물건을 보관했다가 전해주는 서비스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신용카드 결제도 적극 추진할 작정입니다. 소비자들의 불편을 크게 덜고 세금 문제도 해결될 테니까요. 적기에 물품을 사서 공급하는 판매시점관리시스템을 도입해 창고비용을 크게 줄일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무작정 떼를 쓰지는 않겠지만 어려울 땐 정부 쪽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합니다. 서민들을 위한 최고의 사회안전망 정책은 바로 소상공인 지원이니까요.”
임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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