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성공시대/⑨ 진주 실크업계
도배만 해도 집안이 달라 보인다. 건축이 마무리되고 인테리어가 출발하는 지점에 벽지가 우뚝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부산 아펙정상회의를 위해 마련한 회의장 누리마루와 벡스코.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 곳을 장식한 것은 은은한 빛깔의 전통문양 벽지였다. 거기에는 경남 진주의 실크산업 100년 역사가 숨쉬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치는 심정으로 벡스코 공사를 수주한 건설사 시공테크를 방문했어요. 당시 디자인은 개발됐지만 실크원단과 종이를 접합하는 기술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헌데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그 곳 디자이너가 마침 벽면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하더군요. 청자 상감기법 등을 응용한 디자인 샘플 책자를 보여주고 발주를 받아냈죠.”
김진규(44) 대아에스앤피(S&P) 사장은 중국과 타이산 저가 제품에 맞설 실크제품을 찾다 벽지를 착안했다. 그는 “진주시청 지원을 받아 1997년부터 해외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사업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실크는 고급스런 이미지에 보온·방습 효과가 빼어난 최상의 벽지 소재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상아빛깔 실크와 조화를 이룰 색상·무늬를 갖춘 디자인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 때 출구가 된 것이 지역혁신특성화사업(RIS)의 공동기술개발 과제 공모였다. 과제에 뽑힌 대아에스앤피는 2004년말부터 6개월간 한국견직연구원의 디자인지원팀과 함께 전통문양 실크벽지 개발에 매달렸다. 아펙 정상회의장 시공을 따내기 위해 들고간 20가지 샘플이 그때 완성됐다.
아펙 정상회의 때 쓰인 전통 문양의 실크 벽지.
“4천만원 안팎의 자금지원은 가뭄의 단비였습니다. 중국산 원자재가 워낙 고가여서 자칫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판이었거든요. 또 견직연구원의 디자인 노하우와 국제흐름에 대한 충고도 큰 도움이 됐지요.”
대아에스앤피와 오랜 협업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동남실크의 김은종(48) 사장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5년여 전부터 추진한 실크벽지 공동개발이 지역혁신특성화사업 덕분에 돌파구를 찾았고, 마침 아펙정상회의장 건립 덕분에 수요처를 찾을 수 있었다.
동남실크는 완성된 디자인 밑그림을 컴퓨터로 따낸 뒤 베틀(직기)에 거는 공정을 담당했다. 평면에 붙인 무늬의 입체감을 느끼도록 ‘자가드 효과’를 살리는 게 힘들었다. 그 뒤에도 불에 타지 않는 난연가공이나 미생물 번식을 막는 바이오 가공 등 곳곳에 걸림돌이 널려 있었다. 특히 실크 뒷면에 종이를 붙이는 배접에 애를 먹었다. 신축성이 뛰어나 길이를 맞추기도 힘들고, 종이를 붙이면 자꾸 기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두 업체는 전국 각지의 내로라 하는 업체들을 발로 뛰며 찾아다녀 해결책을 얻었다. 아펙정상회의장에 들어간 실크벽지의 2배 물량을 기술개발 과정에서 망쳤다.
“아펙을 장식한 실크벽지는 실크산업 메카인 진주 지역의 노하우와 혁신 노력의 빚어낸 작품이에요. 1970년대 진주뉴똥이라는 고유 상표와 제품으로 내수시장을 주름잡던 향토기업들은 최근 경쟁력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황입니다. 중국산 공세에다 아이티 산업의 발전 덕분에 베틀의 생산량도 늘어 가격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죠. 최근 진주 실크업계는 지역혁신특성화사업을 밑돌 삼아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에 팔을 걷었습니다. 산·학·연·관 협력으로 만든 신기술로 수출길도 적극 모색하고 있고요.”
대아와 동남의 실크벽지 개발을 도운 한국견직연구원의 권순정(45) 연구사업본부장은 “실크벽지 개발과정의 협력모델은 진주의 실크업계가 세계 일류로 비상하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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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견직연구원 권순정 본부장 “진주를 세계적 실크밸리로”
“이탈리아 꼬모나 프랑스의 리용처럼 세계적 명성을 갖춘 ‘실크 밸리’를 조성하는 게 지역혁신특성화사업의 목표입니다. 정부의 지원 아래 경상남도, 진주시, 연구원, 업체, 지역 대학들이 중장기 전략을 마련하고 있지요. 이를 위해서는 네트워크의 구축이 핵심이데, 그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게 우리 연구원입니다.”
한국견직연구원의 권순정(45) 연구사업본부장은 “진주의 실크산업이 100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복용 내수시장을 주름 잡다가 90년대 후반 위기를 맞은 110여개 업체들이 새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서는 국외시장에 눈을 돌리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3년간 투입될 56억원의 특성화사업 자금은 이를 위한 혁신 인프라 구축의 중요한 ‘밑천’이다. 이를 통해 △네트워크 형성 △국제 트렌드 조사 △신기술 개발 △국외마케팅 등의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
네트워크 형성의 첫걸음은 동업자들끼리 ‘상생’할 수 있도록 과도한 경쟁을 막는 것이었다. “수출 때 넥타이용 실크 1야드를 업체들마다 11~15달러씩 다른 가격을 부르면 바이어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권본부장은 “1년간 노력해 일종의 ‘신사협정’ 을 이뤄냈다”며 “업체간 신뢰가 쌓이자 기술을 베낀 뒤 단가를 낮춰 파는 일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최근 잇따른 신기술 개발로 자신감이 쌓인 것도 고무적입니다. 아펙정상회의장을 장식한 대아·동남의 실크벽지는 대표적 성과로 꼽을 수 있지요. 회광실크에서 개발한 남성용 매직실크도 내세울 만합니다. 매직실크는 100% 실크로 만드는 데 가격이 일반 남성복지의 갑절 수준입니다.”
명품 도약은 모방하기 힘든 기술력에 마케팅 능력이 더해질 때 가능하다. 품질 경쟁력을 쌓은 진주산 실크제품들은 최근 국외시장에서 활발한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만 10개 업체가 미국시장에 460만달러 어치를 수출할 예정이고, 지난3월 홍콩국제섬유박람회에 초대돼 12개업체 800만달러어치의 수출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최근 업체들의 투자의욕이 일어나고 있는 게 가장 기쁩니다. 올들어서만 3개 업체가 최첨단 베틀을 갖춘 생산라인을 증설했고, 기술개발도 활기를 띠고 있어요. 남은 숙제라면 기업들이 진주 지역 곳곳에 흩어져있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최근 추진 중인 실크전문단지 조성 사업이 차질없이 마무리돼 핵심클러스터를 형성했으면 합니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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