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주방가구와 생활가전들은 기능성을 중시하는 대신 패션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겉모양보다 실용성 중시해 단순깔끔
세탁기·청소기 수십년간 꾸준한 인기
세탁기·청소기 수십년간 꾸준한 인기
[디자인빅뱅] ⑦ 독일 밀레
주방 및 생활가전 분야에서 최고급 명품만을 고집한다는 독일의 장수기업 밀레의 제품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명성과 달리 언뜻 보기에 단순한 느낌마저 줄 정도다. 주력 제품인 세탁기는 백색가전의 전형적 색상인 흰색 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외형도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밀레의 홍보담당 테오도르 지페르트는 “밀레 제품에서 획기적인 모양이나 요란한 색상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라며 쇼룸(전시장)으로 안내했다.
독일 서북부의 조그만 도시 귀테슬로에 자리잡은 밀레 본사는 겉보기에 단조로운 외관을 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독특한 건물 배치가 시선을 끈다. ㅁ자 형태의 3층 건물은 잔디밭을 중심에 놓고 빙둘러 연결돼 있고, 넓다란 유리창에 둘러싸인 사무실은 양쪽에서 자연 채광을 받도록 설계됐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도록 개방형의 디자인 요소를 가미했다는 것이 회사쪽 설명이다.
겉모양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밀레 디자인의 특징은 제품 구석구석에 투영돼 있다. 밀레가 개발한 최신 세탁기의 드럼은 디자인적 요소를 세탁 기능과 접목시킨 사례다. 원통형 드럼의 안과 바깥 면에 촘촘히 새겨진 수백개의 벌집 모양은 실제로 자연 환경에서 착안한 것이다. 마치 거북등처럼 생긴 드럼 표면은 세탁 때 물과 옷감이 부드럽게 타고 흐르도록 한다. 드럼통에 큰 구멍만 숭숭 뚫려있는 다른 세탁기에 비해 옷감의 손상을 최소화시키고 물 사용량을 줄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고 있다. 마르쿠스 밀레 회장은 “디자인의 힘은 기능성을 살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밀레 디자인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보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더 빛을 낸다는 얘기다.
밀레 세탁기를 뜯어보면 내부 구조의 간결함에 또 한번 놀란다. 과거보다 기능은 훨씬 많아지고 복잡해졌는데도 깔끔하게 처리돼 있다. 지페르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곳까지 콤팩트하게 처리한 덕분에 공정에 걸리는 시간을 줄일 뿐 아니라 사후 서비스를 하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귀테슬로 인근의 소도시 빌레펠드 중심가에 자리한 가전 매장에는 다른 회사 제품에 비해 갑절이나 비싼 제품이 수두룩한 데도 밀레의 인기 모델은 벌써 동이 났다. 주문생산 체제인 데다 휴가철이기 때문에 새 제품을 공급받으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한다. 매장 직원 마리아 쇠닝은 “한번 써본 사람은 견고함에 놀라고, 거슬리지 않는 디자인에 만족해 몇 년을 써도 한결같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격이 너무 높은 것이 소비자의 불만”이라면서도 “최고급 제품군에서 이만한 경쟁자가 없다는 것이 더 아쉽다”고 말했다.
밀레 디자인은 기능성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도 은근한 세련미를 풍긴다. 독창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은 107년 세월 동안 ‘레드닷’을 비롯해 수많은 디자인 상을 수상한 원천이다. 흰색을 고수하는 세탁기와 달리 청소기 색깔은 수십 가지다. 미적 취향이 다른 유럽인들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밀레 회장은 “디자인은 잠깐의 만족에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므로 패션화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밀레가 자체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번 밀레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평균 18.9년을 사용했다. 요즘 밀레 디자이너들의 최대 관심은 ‘20년 이상을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귀테슬로·빌레펠드(독일)/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엔슬린 디자인센터장
“내용 변화 없이 포장만 바꾸는 건 사기”
밀레는 1만5천명의 직원 가운데 절반이 25년 이상 근무한 장기근속자들이다. 고호봉 숙련 노동자 중심의 안정된 고용구조는 밀레 제품을 명품 반열에 올려놓은 주춧돌이자 디자인의 영속성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안드레아스 엔슬린 밀레 디자인센터장은 “이 가운데서도 디자이너들의 역할은 밀레의 고유성을 잘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밀레의 고유성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카 포르세를 보기로 들었다. 거리를 질주하는 이 날렵한 자동차를 보고 포르세임을 금방 알아채듯 밀레 로고를 떼더라도 멀리서 한 눈에 밀레 제품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명품의 힘이라는 것이다.
밀레 디자이너들은 제품 기획과 개발 단계부터 개발 부서와의 토론과 협의에 참여한다. 디자인센터를 따로 떼어내지 않고 제조설비 곁에 두는 것도 디자인-제조-구매-마케팅이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밀레가 고안한 디자인 제품이 몇 달 만에 뚝딱 나오지는 않는다. 새로운 디자인 제품을 보려면 적어도 5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엔슬린 센터장의 설명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 제품이 쏟아지는 국내 시장과는 뚜렷하게 대조된다. 핵심 기능에 충실하다보니 현란한 색깔과 모양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예쁘게 꾸미기보다 전체와의 조화를, 생산자보다는 소비자 편의를 먼저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 가전시장에서 불붙고 있는 디자인 경쟁에 너무 둔감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엔슬린 센터장은 “생활가전은 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모양이나 색깔만 살짝 바꾸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디자인은 밀레에서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테슬로/홍대선 기자
엔슬린 디자인센터장
“내용 변화 없이 포장만 바꾸는 건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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