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내 삶에서 마지막이지 싶은 사랑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신묘한 일이 일어났다. 유행가 가사가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이다. 김광석도, 이문세도 어느새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급기야 평소에는 유치해서 듣기도 싫던 고속도로휴게소의 뽕짝메들리조차 내 얘기로 들렸다. 사람들이 삶의 어느 단면에서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그 미세한 결까지 포착하여 드러내고 위안을 주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한 가지 기능이라면, 그래, 대중가요도 훌륭한 인문학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모름지기 사회과학은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드러내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학창시절 이웃한 단과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에 대해 근거 없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졌던 것도, 따지고 보면 경제학이 그러한 사회과학 중에서도 꽃이라는 것, 경제학자들끼리만 하는 말이지만 ‘사회과학의 여왕’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경제학은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문학의 기능을 할 때가 있다.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가 자주 잊고 지내는 사실이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은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공부하려면 런던의 빈민가부터 다녀오라고 권했다. 물론 따뜻한 마음과 더불어 차가운 머리도 갖추어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때로는 사랑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버릴 것처럼, 때로는 그 어떤 현실의 난관도 사랑만 있으면 눈 녹듯 사라질 것처럼, 인문학의 기능을 넘어 과장하고 현혹하는 역할을 하는 ‘나쁜’ 유행가 같은 경제학도 있다는 사실이다. 세율을 낮추면 오히려 세금으로는 더 많은 액수가 걷힌다는, 세금 많이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처럼 들리는 이론이 있었다. 아서 래퍼라는 경제학자가 어느 레스토랑의 냅킨에 그렸다는 래퍼곡선이라는 그림은 1980년대에는 한국의 경제학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그때 공부했던 이들이 이제 경제학자가 되고 경제신문의 데스크가 되었기 때문일까? 감세 정치인의 상징인 아들 부시조차도 무당경제학이라 비판했던 래퍼의 이론은 이 땅에서도 끝없이 변주되어 나타난다. 감세가 오히려 성장을 촉진하여 세수증대를 가져왔다는 최근 어느 언론의 ‘분석’기사는 그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경제학이 사람들의 삶을 보듬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입맛에 맞는 주문만 골라 외면서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할 때, 그것은 나쁜 유행가 수준을 넘어 너절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 너절한 이데올로기가 심지어는 그 특정 계층에 속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표를 움직여서 세상을 굴려간다. 결국 경제학은 마음을 달래주는 대중가요보다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조차 한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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