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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억압의 수사학

등록 2011-10-02 20:47

모든 사회현상을 ‘피도 눈물도 없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행동의 결과로만 설명하려는 경제학자들의 상징으로 흔히 시카고학파를 말하곤 한다. 바로 그 시카고대학에서 가르친 적도 있던 매클로스키의 원래 이름은 도널드였다. 50대 중반의 어느 날, 그는 이름을 디어드리로 바꾼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수준의 경제학자이면서도 그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영문학자라고 규정한다. 그녀가 보기에 경제학은 수사학, 즉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컵 하나 실수로 깨는 것도 수많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뤄지는데, 사람들은 그 우연들 중에서 몇 개만을 집어내어 생각의 라인을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북촌방향>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겪는 가족간의 문제, 우정, 사랑, 사업상의 교제 등에 대해서도 각자는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이해한다. 같은 시점에 함께 경험한 일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입장에 따라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생각의 라인, 따라서 이야기의 얼개는 달라진다. 그것이 개인적 문제라면 각자 편한 대로 믿고 살아가면 그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작가 김훈은 자신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꽃에 대한 어떠한 언어도 헛되다. 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항상 꽃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꽃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말하는 꽃만이 꽃이라고 주장한다.

어이없는 이들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강요할 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억압받는다. 그것은 단순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억압을 넘어서서, 살아갈 권리 그 자체를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억압이 되기도 한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이끌어냈다는 이야기는 어느새 그가 독재자였다는 객관적 사실, 그 이야기를 배제하는 억압의 이야기로 바뀐다. 그 옛날 다름 아닌 그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던 국회에서 ‘독재’라는 발언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는 해프닝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정치인들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싸울 때, 우리는 흔히 국외자의 입장에서 냉소로 대응한다. 그런데 과학의 이름으로, 이를테면 경제학이 자신의 이야기를 강요할 때, 우리는 그 과학이라는 후광 앞에 어설픈 냉소 대신 순순히 복종하고 만다. 그런데 그 후광은 어느 순간 칼로 변해 우리의 목을 겨눌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도 적어도 자기방어를 위한 의미에서의 권력 의지가 필요한 이유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언론이나 정치인들에 의해 전파되는 ‘만들어진 이야기’ 앞에서 정작 ‘내 삶의 이야기’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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