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오래전의 일이다. 자투리 시간을 때우기 위해 유럽 어느 나라에서 만든 영화를 보았다. 각각 아내와 애인을 둔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를 다룬 그저 그런 내용이었으나,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들의 외모였다. 아무리 접어주고 생각해도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의 여주인공, 거기에다 남자 주인공은 한술 더 떠서, 벗어진 머리에 불뚝 나온 배까지, 나조차도 오랜만에 만만해(?) 보이는 경쟁상대를 만난 느낌이었다.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내용의 영화 <하바나>에 나오는 로버트 레드퍼드와 레나 올린에 비하면, 그들의 사랑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까지 어찌나 어설프고 구질구질해 보였던지! 그러나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영화의 여운은 결코 작지 않았다.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리 큰 고통도 한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담담하게 느껴지듯, 그리고 멀리서 보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일들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지저분한 구석이 가득하듯, 우리의 삶은 원래 그러한 것일 터이므로.
영화가 우리 삶의 반영인 동시에 왜곡이기도 한 것처럼, 경제학 또한 현실을 일정 부분 반영하면서 일정 부분 비튼다. 자본가가 아니라 사용자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 고용관계는 마치 사용자(유저)가 전자제품을 구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래의 이미지로 바뀐다. 노동자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의 공급자가 된다. 몇백쪽이 넘는 미시경제학 교과서를 샅샅이 훑어도 노동자라는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특정한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다른 특정한 용어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노동자의 날 대신에 굳이 근로자의 날을 고집하고, 색깔논쟁까지 불사하며 민주주의라는 말 앞에 자유라는 접두어를 붙이려는 시도들도 그 때문이다. 교과서를 벗어나 거리로 걸어 나오는 순간, 경제학은 정치가 된다. 시장에서 어묵 먹고 행상 할머니의 손을 잡는 것은 ‘민생’을 돌보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럴듯하게 포장한 인공하천이나 광장은 ‘생태’나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선전된다. 정말로 팍팍하고 숨 막히는 민생, 그리고 진정 관심을 기울여야할 또다른 가치들은 그 순간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스크린에서 배용준이나 김태희가 사랑을 속삭일 때,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들 가슴속이 장밋빛 낭만으로 가득 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순간 잠시 잊혀지는 현실의 구질구질함이나 아픔은 극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다시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사족: 아무리 궁리해도 명색이 경제산책이라는 제목의 칼럼에 선거 얘기를 쓸 재주가 없었다. 현명한 독자들께서는 행간의 의미를 읽으실 줄로 믿는다.)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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