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그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철학자 헤겔의 말을 패러디하여 마르크스가 한 유명한 말이다.
사실 ‘사람의 일’이란 그것이 사랑이건 비즈니스건 정치건 간에, 사람들끼리 마주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 구절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셈이다. 장희빈이나 이방원의 얘기가 끝없이 변주되면서 인기드라마가 되는 현상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내친김에 패러디를 이어가자면, 누군가가 청계천 복원사업을 계기로 최고권력을 잡은 것이 비극이라면, 다른 누군가는 세빛둥둥섬으로 흉내내다가 자폭열사가 된 것은 소극이다.
원래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것은 프랑스 역사를 다룬 글에서였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레옹, 즉 나폴레옹 1세에게는 조카가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생물학적 특징을 중요한 기반으로 삼아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 즉 나폴레옹 3세가 된다. 나폴레옹 3세가 소극인 까닭은 그가 전체 인민을 대표한다는 환상을 통해 집권하였다는 데에 있다. 그 어떤 계급도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한 예외적인 국면에서 엉뚱하게 나폴레옹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다음, 황제가 되어 공화정을 무너뜨리는 결과까지 초래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결국 권력은 투표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투표가 때로는 잘생긴 외모나 누구의 핏줄이라는 엉뚱한 요인에 의해 좌우되면서 역사의 후퇴를 낳기도 한다. 국가가 모든 순간, 모든 국면에서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계급이나 계층의 일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87년 체제’라는 말이 부쩍 유행이다. 그 정치적 의미는 독재자와 하수인들이 민주주의를 억압하면서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던 체제를 무너뜨린 데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현 정권의 역사적 의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1987년 체제가 얼마나 소중한 성취였는지를 깨닫게 해준 데에 있다. 시민단체 출신 후보를 중심으로 민주당에서 민주노동당에 이르는 범야권이 한데 뭉쳐 선거를 치른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1987년 체제의 경제적 의미는 무엇일까? 막강한 국가권력이 물러난 틈에서 자본과 노동, 어느 쪽도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하던 1987년과는 달리, 2011년은 자본이 국가마저도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권력자로 등장한 지 오래고, 그 맞은편엔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이 있다.
건전한 상식과 소통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목표만으로도 충분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상황이지만, 그것만으로 경제민주주의의 실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보면서 기쁜 마음속에서도 한 가닥 불안을 느끼는 까닭은 조만간 정치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가 엇갈리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