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와 나] 벼랑 내몰린 희귀병환자·제약업체
‘허가-특허 연계조항’ 적용땐 미 제약사 막강권한
복제약 제조할때 특허사실 확인받거나 소송해야
생산 늦어지고 금지 가능성…약값상승도 불보듯
제약업계 연 1500억 피해예상…중소업체 ‘
‘허가-특허 연계조항’ 적용땐 미 제약사 막강권한
복제약 제조할때 특허사실 확인받거나 소송해야
생산 늦어지고 금지 가능성…약값상승도 불보듯
제약업계 연 1500억 피해예상…중소업체 ‘
신장암 4기 환자인 이은숙(50)씨는 항암제인 수텐 약값으로 다달이 420만원가량을 지출하고 있다. 이씨는 암세포가 갑상샘으로 전이돼 이미 절제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폐까지 퍼진 암세포를 치료하느라 수텐에 의지하는 처지다. 이씨는 “처음엔 다른 치료약을 쓰다가 수텐을 2차로 처방했는데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다 보니 비싼 약값을 모두 물고 있다. 약값 때문에 수천만원의 빚을 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씨의 걱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약값이 천정부지로 오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현재 이씨가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항암제 수텐은 미국의 대형 제약회사 화이자가 특허를 갖고 있다. 이씨는 “지금 암세포는 더 늘지 않고 있고, 약을 먹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약값이 너무 비싸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미 협정의 불똥은 이씨처럼 특허약에 매달리는 환자들로부터 값싼 복제약(제네릭)이 나오리라는 희망을 앗아갈 소지가 많다. 협정 제18조(지적재산권)에 포함된 ‘허가-특허 연계조항’이 대표적인 불씨다. 허가-특허 연계제도란 국내 제약회사가 값싼 복제약 제조 허가를 신청할 경우 식약청이 해당 약의 특허권을 가진 미국 제약사에 이 사실을 통보해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협정 발효 3년 뒤부터 적용된다. 값싼 복제약을 생산·발매하려는 제약업체로선 특허권자로부터 일일이 특허 만료 사실을 확인받아 오거나 아니면 소송에서 이겨야 하는 탓에, 자연히 복제약 생산이 늦어지고 약값 상승을 불러올 여지가 큰 셈이다. 심지어 소송 진행중에는 생산 자체가 아예 금지된다. 천경호 한국제약협회 상무는 “기존 복제약 가격이 올라가지는 않지만 복제약 생산이 위축되어서 다국적 제약사들이 특허약을 오랜 기간 동안 비싼 값에 팔 수 있게 만든다. 복제약을 만들지 못해서 도태되는 한국 제약사가 늘면 시장점유율을 높인 다국적 제약사가 이런 효과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허가-특허 연계제도를 논외로 하더라도 다국적 제약사들이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를 이용해 한국 정부의 인위적 약값 인하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대부분 복제약 생산에 몰두하고 있는 국내 중소제약업체들도 당장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태다. 지금까지 국내 제약회사들이 개발에 성공한 신약은 17종뿐이다. 그나마 신약 개발 여력이라도 갖춘 곳은 상위 6~7곳에 불과하다. 한 중소제약회사 관계자는 “정부에서 3년은 유예되니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장기적인 피해가 불 보듯 뻔하다”며 “다국적 제약사에 국내 제약사가 종속되는 것은 물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7월 한-미 협정에 따른 국내 제약업계 피해 규모가 연평균 490억~107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업계 추정치는 이보다 더 높다. 한국제약협회는 2007년 건강보험 청구액 기준으로 연평균 1465억원의 피해가 예상된다고 밝힌 바 있다. 천 상무는 “허가-특허 연계제도는 한국-유럽연합(EU) 협정에서도 도입하지 않았고, 미국이 페루·파나마·콜롬비아와 맺은 협정에서도 2007년 재협상을 통해서 뺀 적이 있다”며 “우리 정부도 허가-특허 연계제도만이라도 없애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유예기간 3년이라도 보장받은 제약업계와 달리, 기업형 슈퍼마켓의 위세에 눌린 지역상권은 이미 한-미 협정에 따른 추가 충격의 가시권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에 관한 법(상생법)이라는 방패마저 사라질 수 있는 탓이다. 예를 들어 중소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사업조정제도(상생법)와 전통상업보전구역(유통법)은 모두 한-미 협정의 서비스 분야(제12.4조 시장접근 1항)에서 금지하는 ‘경제적 수요 심사를 통한 서비스 공급자 수의 제한’에 해당한다. 대형마트의 심야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조처도 ‘서비스 영업의 총수와 총 산출량에 대한 제한을 금지하는 조항’(제12.4조 3항)과 정면충돌한다.
2009년 8월 문을 연 롯데슈퍼 서울 묵동점 일대 지역상권은 이미 한차례 기업형 슈퍼마켓의 위력을 맛본 상태다. 묵동점 바로 옆 가게는 올해 초 가게를 팔았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섰다. 하지만 한-미 협정은 더 큰 파도다. 김근의 서울중동부슈퍼마켓협동조합 부장은 “조합 등이 힘을 합쳐 7~8년 동안 싸워서 유통법을 통과시켰는데 한-미 협정으로 도로 허사가 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에이즈에 걸려 11년째 고통받고 있는 윤가브리엘씨가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석관동 자택에서 치료제인 푸제온(Fuzeon)을 들어 보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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