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은행잎이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길 위에 낙엽이 쌓인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깔려 있는 은행잎 사이로 군데군데 보도블록을 끼워놓은 듯했다. 서울의 어느 대학, 내 이십대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그곳, 그 후문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한참 동안 혼자서 거닐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젊음의 불꽃놀이 대신 다탄두 최루탄(이른바 지랄탄)이 푸른 하늘 위에서 폭죽을 터뜨릴 때면, 어느 시구처럼이나 그야말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는 나날들이었다. 착각이었을까? 파편이 채 땅에 떨어지기 전의 최루탄에서는 묘하게도 커피 냄새가 났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낙엽 태우는 냄새가 커피 볶는 냄새 같다고 했다던가? 그는 일제 시대에 자라 지금 내 나이도 못 채우고 요절한 천재였으니, 그렇게 말한 것은 기껏해야 1930년대일 터. 그 시절, 커피 볶는 냄새를 일상의 감각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이들이 조선 사람들 중에서 몇 퍼센트나 되었을까? 젊은 날의 내가 그 글에서 거부하고픈 어떤 기운을 느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효석이 식민지의 낙엽으로부터 커피향을 맡았듯이 다행히도 사랑의 진리마저 우리를 버리지는 않았으니, 우리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사랑도 했다.
지금의 이십대, 한 세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진 세계적인 수준의 첨단강의실과 에스프레소 커피점으로 가득 들어찬 캠퍼스에서, 이제는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에워싸인 우리의 후배들. 그들도 사랑을 하고 꿈을 꾸며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386세대가 열명만 모여도 최루탄을 던지며 쫓아오던 사복경찰들, 그들에게 머리채 잡혀 끌려가는 여학우들을 보면서 ‘이념적 좌파’로 단련되었다면, 지금의 이십대들은 결국엔 극소수밖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한, 끝없는 스펙 쌓기 경쟁 속에서 ‘생활형 좌파’로 단련되고 있는 듯하다.
이들에게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 속에서도 청춘은 원래 그러한 것이니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 줄 것인가, 아니면 유머의 정치학으로 맞서서 현실을 조금씩이라도 바꾸어 나가다 보면 좋아질 것이라 말해 줄 것인가? 그 어느 조언도 공허하게 느껴짐은 그저 철 지난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는 처연함 탓만은 아니리라.
386세대에게 남겨진 사회적 소명이라면,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1980년대의 성과와 2030세대의 자유분방함을 ‘진보’라는 공통의 키워드로 묶을 수 있는 지점과 방식을 찾아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은행잎 떨어진 거리에서 이효석과 386세대,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가 하나 되어 만나는 꿈, 그 꿈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기 위해 2012년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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