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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말의 시작, 그 이전

등록 2011-12-11 20:44

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는 행위, 즉 증여는 경제인류학에서 오랫동안 연구되어온 주제다. 그런데, ‘증여의 수수께끼’를 다루는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의 책을 읽다 보면, 뜻밖에도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의가 등장한다. 증여행위의 논리를 설명하는 폴리네시아 지역 원주민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논점과 관련해서이다.

사람들이 처음 언어를 갖게 되었을 때, 요즘의 아이들이 말을 배우듯이 ‘엄마’처럼 간단한 단어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씩 배워나가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리된 말의 체계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 그래서 한마디씩 순차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므로. 그렇다면, 말의 체계는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갑자기 봇물 터지듯이 대폭발(이른바 빅뱅)을 통해 생겨난 것일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감정이나 생각의 양에 비해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의 양은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수십 단어만의 조합으로 모든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는 어느 원시부족에 국한된 일은 아니리라. 내가 ‘너’에게 갖는 감정, ‘그 사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거꾸로 ‘너’가 내게 갖는 감정, ‘그 사건’을 보는 다른 이들의 생각 등속을 한정된 어휘로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언어학에서 말하는 기표, 즉 내가 골라서 쓰는 말이 원래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실체적인 개념, 즉 기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뜻이 될 것이다. ‘말길이 끊어지다’라는 표현은, 그러므로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을 넘어 삶의 현실, 나아가 사회과학적 현실의 문제가 된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미래>에서 “사랑의 실패란 많은 경우 사랑을 말하는 언어의 실패”라고 했다. 이 말이 삶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바야흐로 ‘복지’라는 단어는, 몇 년 전 정확히 ‘성장’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정치권의 죽고 삶을 가르는 싸움의 키워드가 되었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시작된 이슈는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의 논쟁을 거쳐 일 년 만에 서울시장을 다시 뽑는 파동을 가져왔고, 이제는 행세깨나 하는 정치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복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말할 수밖에 없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정치인의 경우, 특히 선거 국면에서는, 표를 얻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기표와 기의가 서로 엇갈리는 현상은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말 이전에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복지’라는 키워드 이전에 ‘행동’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성경 구절을 패러디하자면 태초에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밝은 눈으로 그 실천의 궤적을 검증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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