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젊은 나이에 죽음’, 국어사전이 풀이하는 요절의 뜻이다. 이 의미대로라면 나와 같은 세대 중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나 가수 김광석 정도가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물리적으로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니었으되 홀연 충격적인 모습으로 떠나간 어느 정치인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왠지 사전의 뜻풀이가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게만 다가오는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완성된 형태로 남은 것은 그들이 감정의 절정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 뜨거운 예술혼, 순수한 그 무엇에의 열정, 이 모든 것은 당사자의 죽음 앞에서 영원히 빛을 발하는 법이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변질될 수 없는 것, 즉 원천적으로 빛바램의 가능성이 닫혀 있는 것, 바로 요절의 메타포(은유)이다. 그것은 간절히 도달하고 싶으나 실재하지는 않는 유토피아와 상징적 의미를 공유한다. 그 환상적 성격을 직시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훼절이나 굴욕이 되는 아이러니를 갖는다. 이를테면 극우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한때의 급진 좌파 투사에게서 삶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진정성을 찾아내지 못할 바도 없겠으나, 마치 유흥주점에서 취객을 위해 트로트를 연주하는 왕년의 록밴드만큼이나 처연한, 심지어 비루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현실에서는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딜레마, 그 때문에 요절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치명적인 유혹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메타포는 정확히 여기까지다. 사회과학, 아니 현실의 삶은 이 딜레마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그저 1인 1표의 선거형식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경제민주주의의 부재가 결국에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로 이어진다는 것, 주관적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을 실천으로 입증한 것이 지금 정권의 가장 큰 역사적 기여일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어쩌면 상징을 둘러싼 싸움일지도 모른다. 상징의 교체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좋은 상징’만으로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경제민주주의의 성취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안타깝게도 두 번에 걸친 ‘진보’정권이 지금 정권의 거울 이미지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요절한 이를 가슴에 묻고 나서도 살아남은 이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야말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유물론의 철칙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정의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지 못할 때, 죽음으로 완성된 듯 보였던 가치는 다시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오늘, 요절을 꿈꾸는 동시에 그 극복을 열망한다.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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