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교수의 경제산책
지난해 여름, 몇 차례인가 세속의 번잡함을 피해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찾았다. 그 절에 얽힌 사랑 얘기를 읽은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백석과 자야는 셰익스피어가 말한 ‘별(운명)이 엇갈리는 연인들’이었다. 식민지시대의 시인 백석은 기생인 자야와 사랑에 빠지지만, 인습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헤어진다. 역사의 간지까지 겹쳐 백석은 평생을 북한에서 보내게 되고, 자야는 서울에 남아 요정을 운영한다. 길상사는 바로 자야가 죽기 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한 요정 터에 세워졌다.
슬픈 사랑의 에피소드로부터 나는 구조와 개인의 관계를 떠올렸다. 개인이 구조를 거스르려 할 때 얻는 건 많은 경우 때로는 죽음으로까지 이르는 좌절일 따름이다. 해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주어진 구조를 체념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구조라는 것도 결국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이를테면, 백석이 바람머리를 휘날리며 광화문 네거리를 활보하던 잘생긴 예술가가 아니었더라면, 자야가 일본 유학까지 한 아름답고 지적인 기생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의 슬픈 사랑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 사회의 낡은 정치경제적 구조의 청산이 문제가 되는 시점이다. 그러므로 백석과 자야의 자리에는 ‘진보’와 ‘대중’을, 그들의 엇갈린 사랑에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넘어야 할 구조라는 상황적 의미를 대입해서 읽어보아도 좋을 법하다. ‘진보’는 개인보다 구조를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흔히 개인을 계몽함으로써 한 방에 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 ‘진보’가 대중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종종 버림받게 되거나, 더 나쁘게는 배신하게 되는 이유의 한 자락이 여기에 있다. 구조가 중요한가, 아니면 개인이 중요한가라는 사회과학의 오랜 물음에 대해, 명색이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나로서는 구조를 골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의 잔상 탓인지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자꾸만 개인으로 기운다.
구조의 극복을 꿈꾸었던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갈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자야는 그런 백석을 끊임없이 타이르며 세상 속으로 되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떠난 것은 백석이고, 평생을 사랑의 기억과 함께 남은 것은 자야였다. 그렇다면 진실로 구조를 뛰어넘은 쪽은 오히려 자야가 아니었을까? 비록 자야 자신 ‘봇물이 터지는 듯한 그리움’으로 살다 죽었을지언정, 그것은 적어도 가야 할 방향만은 분명한 길인 까닭에 결코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터이므로. (이것은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이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을 논의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아직도 가끔씩 꺼내 읽어보곤 하는 고 정운영 선생의 오래전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써 어설펐던 경제산책을 이제 마치고자 한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의 삶, 나아가 한국 사회의 일대 전환에서도 중요한 지침이 되기를 바라면서.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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