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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공장 한귀퉁이 입점해 함께 침몰…‘파견 사장’의 절망

등록 2015-07-05 21:43수정 2015-07-07 17:06

원청인 그린테크놀로지 공장에 입주한 하청업체 투플렉스의 기계 설비. 기계 앞에 압류를 뜻하는 ‘빨간딱지’가 붙어있다. 투플렉스에 자재를 납품하는 업체가 대금을 못 받자 취한 조처다. 류이근 기자
원청인 그린테크놀로지 공장에 입주한 하청업체 투플렉스의 기계 설비. 기계 앞에 압류를 뜻하는 ‘빨간딱지’가 붙어있다. 투플렉스에 자재를 납품하는 업체가 대금을 못 받자 취한 조처다. 류이근 기자
[탐사기획] 하청업체 울리는 ‘악마의 대출’
그린테크 안의 ‘투플렉스’ 가보니
지난달 10일 오후 늦게까지 강민수(가명·42) 사장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회사 직원 역시 전날 저녁부터 사장과 통화하지 못했다고 했다. 강 사장은 이틀 전 기자와 통화하면서 “부도 위기에 몰린 사장들이 왜 갑자기 잠수 타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회사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만세 부른 거 같다”는 반응이었다. ‘만세’는 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적’을 뜻한다. 강 사장이 빚에 쫓겨 회사를 제대로 정리하지도 않은 채 잠적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강씨는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부품 제조업체인 투플렉스의 사장이다. 지난 5월 말 원청업체인 그린테크놀로지가 부도나면서, 그의 회사에 자재를 납품한 업체들과 대출을 해준 은행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 거래은행은 그린테크가 갚지 않은 ‘외상매출채권(어음) 담보 대출’(외담대) 4억3000만원의 상환을 요구하고 있고, 자재업체들은 6억원의 대금 결제를 요구했다. 더는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위급한 처지에 몰렸지만, 그는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다. 그날 밤 그의 집을 수소문해 귀가하는 강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강 사장은 “오늘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움직였다. 손든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강 사장은 이른바 ‘파견 사장’이다. 투플렉스는 형식상 독립회사지만, 실제로는 원청업체인 그린테크에 속해 일을 한다. 공장도 사옥도 따로 없다. 그린테크가 공장이자 사옥이다. 그가 여느 일반 사장과 달리 ‘파견 사장’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실제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위치한 그린테크 공장에서 투플렉스라는 회사가 운영중이라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투플렉스가 쓰는 그린테크 공장 안 160여평의 공간엔 투플렉스 로고 대신 그린테크의 로고인 지티(GT) 마크가 찍혀 있다. 입구 오른편에는 투플렉스가 쓰는 조그만 사무실이 하나 있다. 대여섯명이 앉을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다. 그린테크로부터 납품받는 상위 업체가 실사를 나오면, 이곳은 투플렉스가 아닌 그린테크의 한 부서로 소개되곤 했다. 투플렉스 직원들은 모두 그린테크 작업복을 입고 일했다.

기계설비 늘려라, 단가 깎아라
원청업체의 부당한 요구 견뎌와

은행 “외담대 4억3천만원 갚아라”
자재업체들은 “6억 결제해달라”
양쪽서 압박…8년간의 땀 물거품

투플렉스는 휴대전화 부품인 ‘연성 인쇄회로기판’(FPCB)을 만드는 과정 중 하나인 ‘적층’을 맡고 있다. 여러 소재를 붙여 회로기판을 만드는 일이다. 외주업체가 아예 입주해 원청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것이다. 그린테크 공장 안에 이런 입점 업체는 에스피테크놀러지 등 모두 12곳에 이른다. 한 하청업체 사장은 “그린테크는 돈 없이 공장을 돌려왔다. 큰 덩어리는 회로라인 하나만 있고, 나머지 공정은 거의 입점 업체들이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원청업체인 그린테크는 입점 업체인 투플렉스를 ‘잡은 물고기’처럼 취급했다. 때마다 기계설비를 늘릴 것을 요구했고, 과도한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 올해 초 새 공장으로 이전할 때는 ‘처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며, 투플렉스에 기계설비를 7대에서 12대로 늘리라고 요구했다. 공장 임대료도 평당 월 3만3000원으로, 바깥보다 10% 정도 더 높게 받았다. 공장 이사에 따른 설비 이전 비용 1억여원도 고스란히 투플렉스가 떠안았다.

투플렉스뿐만 아니라 다른 입점 업체들도 그린테크의 부도로 바깥 업체보다 훨씬 큰 피해를 봤다. 원청업체와의 거래 규모가 크고 관계도 훨씬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한 하청업체 사장은 “노예적 관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강 사장은 왜 이런 불공정한 관계를 견뎠을까? 그는 “입점 업체는 비수기 때 최소한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윤을 적게 보더라도 입점 업체는 멈추지 않고 공장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휴대전화 부품업계가 어려워지고 그린테크의 자체 물량이 줄면서, 원청업체 의존도가 절대적인 입점 업체는 비수기 물량을 확보하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원청업체가 망하면, 입점 업체는 외부 하청업체보다 더 쉽게 따라 망한다.

강 사장은 평생 ‘기계밥’을 먹었다. 1990년대 초 고교를 졸업한 뒤 충북 음성에 있는 패널 제조 회사에 다녔다. 수입은 들쭉날쭉했다. 일찍 가정을 꾸린 그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안산으로 넘어온 이유다. 당시 안산은 휴대전화 부품의 일종인 피시비(PCB) 업계가 붐을 맞고 있었다. 이 업계에서 말단 직원부터 생산 총괄까지 두루 거친 강 사장은 8년 전 친구와 함께 회사를 차렸다. 투플렉스다.

지난해부터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사업이 침체에 빠지면서 그린테크는 물품 발주를 대폭 줄였다. 특히 올해 초부터 심해졌다. 공장 기계가 돌지 않고 서 있는 날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5월26일에는 원청업체인 그린테크가 부도를 맞았다. 투플렉스는 그린테크가 발행한 어음을 은행에 맡기고 대출받아 썼는데, 이 돈을 투플렉스가 갚아야 할 상황이 됐다.

보름 새 이미 상환했거나 새로운 대출로 갈아타는 ‘대환대출’을 받은 다른 하청업체들이 꽤 많다. <한겨레>가 은행에 확인한 결과, 전체 피해 금액의 3분의 1(6월12일 기준)에 이른다. 기판 검사를 담당하는 ㅇ솔루션은 이미 상환했고, 기판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티플렉스는 은행의 압박에 금리가 높은 대환대출로 갈아탔다.

은행에서는 강 사장에게 날마다 상환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 요구에 쉽게 응하지 못하고 있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다. 어음을 담보로 한 대출을 판매업체가 갚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8년 동안 키워온 회사지만, 이제 강 사장의 손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회사 장비들에는 ‘공정증서’ ‘본 장비는 ○○ 자산입니다’라는 내용의 딱지가 다 붙어 있다. 기계의 주인이 더 이상 투플렉스가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다. 회사 장비로 업체에 줘야 할 자재값을 대신 물고 있는 것이다. 워낙 경기가 좋지 않은 탓에 중고 장비 가격이 낮아, 이렇게 해서도 채무의 일부밖에 변제할 수 없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고 하지만, 강 사장은 “이렇게라도 상환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한때 30여명에 달했던 직원은 2명 남았다. 8명의 전·현직 직원들은 석달치 임금이 밀려 있다. 이날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여직원도 곧 회사를 그만둘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밀린 월급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강 사장은 500만원으로 책정된 본인 월급을 집에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무려 6개월에 이른다. 이 때문에 그의 부인은 한달여 전 안산 지역에 작은 반찬가게를 열었다. 강 사장은 “사업 시작할 때도 가족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 아내의 반찬가게를 내면서는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공존하는 듯했다. 지난달 10일 인터뷰 때 강 사장은 “임가공 업체는 수명이 짧다. 임가공이 아닌 원재료 분야에 재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며칠 앞서 한 전화 인터뷰 때는 “인쇄회로기판 분야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지긋지긋하다. 다른 일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확실한 건, 다시는 입점 업체를 운영하지는 않겠다는 그의 각오였다. 최현준 류이근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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