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 100일을 맞은 지난 3월30일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집행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해 한미 FTA를 수술대에 올리는 작업에 나섰다. 미국 상무부가 교역상대국별 무역적자를 재분석하고 원인을 파악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다.
국제관계에는 도덕성이나 합리성보다 힘의 논리가 먼저다. 국제질서도 원칙이나 법치보다 강대국 논리가 우선하는 냉혹한 현실이 낯설지 않다. 2007년 한미 FTA 재협상 당시만 해도 그렇다. 이미 타결됐는데도 자국 내 반발이 거세자 협정문 규정상 어디에도 없는 ‘재협상’을 요구해 만족할 만큼 얻어낸 나라가 다름 아닌 미국이다.
그랬던 미국이 이제 와서 한미 FTA를 ‘끔찍한(horrible) 협상’이라 비난한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5월11일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편파적인 협상이 아닌, 공정한 협상을 하면 미국이 매우 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천동지할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G2’의 한 축인 미국을 상대로 불공정한 협상을 벌여 엄청난 이득을 챙긴 ‘G3’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또 그만큼 미국은 졸지에 협상력 ‘꽝’인 나라가 됐다. 약소국의 설움을 느껴야 할지 강대국의 자긍심에 우쭐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런데 정작 미국이 주장한 ‘공정한 협상’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다. 특히 미국 정부 고위 인사들은 제각각 다른 단어를 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FTA 재협상(renegotiation)이라고 하고, 펜스 부통령은 재검토(review) 혹은 개선(reform)이라고 했다. 윌버 로스 상무장관은 재개(reopen)라고 했다. 이 용어들은 한미 FTA 협정문 어디에도 없는 초법적인 것인 데다 개념이 다 같은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오랫동안 ‘불통 대통령’에 시달렸던 우리를 배려해 개념상의 혼란을 각오하더라도 최대한 쉬운 단어를 고른 것일까? 상황이 이런데도 국내 언론은 혼란스러운 용어들을 받아 적기에 급급할 뿐 이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미국 쪽에도, 우리 정부에도 묻지 않는 듯하다.
그간 한미 FTA가 불공정했고, 그래서 재협상인지, 재검토인지 개선인지를 하자는데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명(正名)’이다. 무릇 정명은 학문의 출발점이자 현실에서는 정책과 제도의 기본을 이룬다. 치열한 법리 공방을 통해 자국의 이해를 관철해야 하는 통상협상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 흐릿하면 목표도 결과도 모호해질 수 있다. 막연히 ‘한미 FTA 재협상’ 대응전략 마련에 부심하기 전에 이것부터 미국 쪽에 요구하고 합의해야 한다.
미국의 답변을 듣기 전에 ‘재협상’이란 용어부터 톺아보자. 통상적으로 양자 간 FTA가 성사되기까지는 정부 간 공식협상이 있고 이 과정에서 내용상 타결이 되면 이후 법률검토를 거쳐 정부 간 서명에 이른다. 그런데 한미 FTA의 경우 서명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전무후무한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 정부는 재협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버텼으나 결국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추가 협의’라는 미명하에 협정문을 다시 쓰는 ‘재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재협상 요구는 상대국에 심대한 굴욕감을 안기는 것이다. 개선이나 재개도 통상법에서는 쓰지 않는 모호한 용어인데, 이렇듯 불분명한 무언가를 미국이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전략적 모호성이던가.
우선 미국이 뭐라 칭하든 우리는 한미 FTA ‘개정협상’으로 통일해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정 요구는 협정문에 근거한 적법하고 정당한 것이며, 나아가 법대로 하는 게 미국의 요구수준에 일정 한계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거부한다면, 한중 FTA에도 불구하고 사드보복을 감행한 중국과 미국이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부각하자. 이 점이 대미 무역흑자로 인해 우리와 유사한 처지에 놓인 중국이나 일본과 확연히 다른 우리의 유리한 점이다.
한미 FTA 협정문 중 최종규정을 담은 24장 2조는 개정(amendments)에 대한 것으로, ‘양 당사국은 이 협정의 개정에 서면으로 합의할 수 있다. 개정은 양 당사국이 각자 적용 가능한 법적 요건 및 절차를 완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서면 통보를 교환한 후 양 당사국이 합의하는 날에 발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협정문 24장의 5조는 발효 및 종료(Entry into force and termination)에 관한 규정으로, 이에 따르면 한미 양국 중 한 측이 협정의 종료를 희망하면 서면으로 통보하고 그로부터 180일 후에 자동으로 종료된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재협상을 통보했다는데 한국 쪽은 정식으로 통보받은 적이 없다고만 하고 끝날 게 아니다. 즉 개정협상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통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이 서면에 합의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개정협상밖에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서면으로 정식 요청하라고 분명히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개정협상은 발효 뒤 몇 년 정도 경과하면 미개방 분야를 추가하거나 조문을 명확히 하기 위해 추진한다. 국내에서도 이미 선례가 있다. 현재 한국은 한-칠레 FTA(2004년 발효), 인도(2010년 발효), ASEAN(2007년 발효)과 개정협상을 진행 중인데 정부는 이를 개선(업그레이드) 협상이라 칭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정부도 이를 위 FTA 협정문 모두 최종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개정’ 협상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 일본의 경우도 최초의 FTA인 일-싱가포르 FTA(2002년 11월 발효)를 2007년 9월에, 두 번째 FTA인 일-멕시코 FTA (2005년 발효)도 2012년 4월에 각각 협정문의 개정 조항에 근거하여 개정의정서를 발효시켰다.
두 번째로, 한국이 어떤 불공정 행위를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트럼프 대통령은 편파적인 협상이 아닌, 공정한 협상을 한다면 미국이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 불공정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힌 바가 없다.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모호성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국 쪽 여러 유관기관은 한미 FTA가 양국 모두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적잖이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엇박자도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나.
미국의 국제무역위원회(USITC)가 2016년 6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미 FTA가 없었다면 2015년에 자국의 대한 무역적자가 440억 달러였을 텐데 한미 FTA 덕분에 157달러가 개선된 283억 달러 수준에 그쳤다며 한미 FTA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는 미국이 역대 체결한 FTA 중 캐나다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USITC, 2016, pp 138-139). 게다가 보고서는 지재권 보호수준 강화가 FTA와 결합할 경우 미국의 기술수출이 증가하며 FTA의 투자 챕터에서 투자보호수준이 강화되고 투자자-국가 국제중재제도(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가 포함되면 미국의 수출이 증가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인 3월 1일 무역대표부(USTR)가 발표한 ‘2017년 통상정책 아젠다’에서도 한국에 대한 강력한 무역제재는 거론하나 한국의 무엇이 구체적으로 불공정무역인지는 별 언급이 없다. 오히려 3월 30일 같은 기관이 발표한 ‘2017년 무역장벽 보고서’에서는 일부 예년 수준의 무역장벽을 언급하되 한미 FTA가 한국 내 전반적인 기업환경 개선 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 밖에도 KOTRA(2017)에 따르면 미국 농림부, 미 상공회의소, 헤리티지 재단 등도 한미 FTA에 따른 자국산 제품의 가격경쟁력 확보, 브랜드 인지도 상승, 서비스산업에서의 한국 시장 진출 용이성, 한미관계 강화, 미국 내 고용창출에의 기여 등 긍정적 측면을 높이 평가하였다.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이것이 ‘끔찍한’ 협상의 결과인지 말이다.
<위코노미>에서 한미 FTA 5년 평가에 대한 평가, 한미 FTA 개정협상의 기본 방향 및 협상팀 구성 방향, 새로이 신설되는 통상비서관의 역할과 기능을 포함한 국내 통상 거버넌스의 개편방향에 대해 시리즈로 풀어보겠다. 어쩌면 미국에서도 한국에 이어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 경우 미국 내 복잡한 정치사정으로 인해 한미 FTA는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우리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다. 혹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피하고자 도리어 외부에서 공공의 적을 찾을 경우 가장 만만한 상대인 한국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다. 미리 만반의 대응전략을 마련해 두는 게 좋겠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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