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날부터 연일 특종이 쏟아졌다. 1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은 40분에 걸친 전화통화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고자 한미 미사일 지침을 한국 뜻에 따라 개정하기로 합의해 긴밀한 양국공조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트럼프가 백악관 참모들에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폐기 준비를 지시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3일에는 이틀 전 뉴스를 조롱하듯,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한미공조가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점에 한국은 트럼프와 북한에 동시에 세게 두 방을 먹었다. 아직 좀 더 사태추이를 살필 필요가 있으나 현시점에서 트럼프의 한미 FTA 폐기 발언을 둘러싼 행간을 읽어보고 우리의 향후 대응방향을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왜 한미 FTA 폐기 카드를 빼 들었을까?
우선 그의 한미 FTA 폐기 발언의 진의 파악이 시급하다. 그가 앞으로의 개정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실제 한미 FTA 폐기까지 가져갈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아직 단언하기엔 이르나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는 보지 않는바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도 유사 전략을 쓰고 있어서다. NAFTA의 경우에도 선거유세 때부터 수차례 폐기 운운했고 재협상이 시작된 뒤에도 네 차례나 폐기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실제 협상 테이블에서의 미국 측 분위기는 그리 험악하지 않다고 한다. 이를 고려하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도 다분히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두르는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미 FTA의 폐기 가능성이 제로라고 보긴 어렵다. 트럼프는 NAFTA도 한미 FTA도 충분히 폐기할 수 있는 예측불허의 인물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보다 트럼프 우선주의(Trump First)인 듯하다. 그에겐 미국 전체의 경제나 외교·안보적 이익보다 러스트 벨트(쇠락한 제조업 지대)의 백인노동자들을 위시한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족하게 해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다급한 문제로 보인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함수는 어느 협정이든 폐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렛대 삼은 자신의 요구사항 관철이다. 필자는 한미 FTA 폐기 여부가 의외로 NAFTA 재협상의 진전 여부와 밀접히 연동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가 한미 FTA를 폐기하는 건 그것을 지렛대로 NAFTA에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을 때일 가능성이 크다. 역으로, NAFTA에서 뭔가 얻을 게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그것을 폐기하면서 한국도 미국에 협력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이며 한미 FTA라도 건지려 할지 모른다.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NAFTA와 한미 FTA 둘 다 폐기하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고 미국의 시스템이 그것을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한미 FTA 폐기 발언 시점에 주목
이에 트럼프의 한미 FTA 폐기 발언이 나온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행간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이번 한미 FTA 폐기 운운하는 그의 고강도 대응에서 역설적으로 NAFTA 재협상이 자신의 의도대로 진척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의 조바심이 읽힌다. NAFTA 재협상 중 최대 난제가 자동차의 원산지규정에 관한 것이다. NAFTA산 자동차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현행 자동차의 원산지규정은 역내 부가가치기준 62.5%를 적용하고 있는데 미국은 자국산 부품사용을 최대화하기 위해 이를 더 높이고자 한다. 이에 멕시코 측이 70%를 제안했으나 윌버 로스 미 상무부 장관은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자 캐나다와 멕시코의 반발이 거세다. 또 다른 핵심 쟁점인 환율조항에서도 난항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NAFTA든 한미 FTA든 뭔가 가시적 성과를 내야 30%대로 곤두박질친 지지율을 끌어올릴 발판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NAFTA의 경우는 미국과 멕시코의 정치 일정상 올해 안에 승부를 내야 하나 8월 20일에 있었던 첫 회동에서 별 진전이 없었다. 게다가 8월22일 한미 FTA 재협상에 시동을 걸려던 찰나에 한국이 ‘감히’ 영향분석부터 하자고 제동을 거니 한미 FTA 폐기라는 강공 카드를 꺼내 든 것이 아닐까. 트럼프는 NAFTA와 한미 FTA를 두고 저울질하다가 상황에 따라 후자로 과녁을 이동할 수 있다. 왜냐면 전자는 23년 묵은 협정의 재협상이라 쟁점이 많고 복잡하며 상대는 캐나다와 멕시코 두 나라다. 그에 반해 후자는 5살짜리 협정에 불과하고 상대는 전자보다 경제적 상호연관성도 적고 미사일 사용지침 변경 여부를 미국에 물어야 하는 한국뿐이다. 협정 폐기 시의 부작용도 전자보다 덜하다. 따라서 후자 폐기를 지렛대 삼아 전자에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전자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6월29일 오후(현지시간)백악관에서 열린 정상간 상경례및 만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담소하고있다. 워싱턴/청와대사진기자단
한국 정부의 전략적 실수와 전략 전환의 필요성
한국 정부는 한미 FTA 재협상 논의가 불거진 이래 협상 전략상 두 가지 실수를 범했다. 첫 실수는 협상의 전개 방향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 시 40조 원 상당의 대미 구매와 투자 등의 선물 꾸러미를 안겨 중요한 우리의 협상 카드 하나를 먼저 써버린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둘째 실수는 한미 FTA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이다. 기존질서의 균형을 깨려는 자와 현상유지를 원하는 자가 협상에서 만날 경우 잃을 게 없는 전자가 후자에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따라서 후자는 설령 현상유지를 원하더라도 그 패를 보이는 순간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므로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줄곧 한미 FTA는 양허이익의 균형을 이룬 것이고 우리에게 유리하니 현상유지를 원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니 미국으로선 폐기라는 강공카드를 먼저 꺼내 들어 한국의 허를 찌른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정부도 한미 FTA에 대해 불만이 많으나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어려워 참았을 뿐이니 개정할테면 해보자는 식으로 접근했어야 했다. 우리 정부의 안이한 상황 판단이 트럼프의 강공모드로의 전환에 일조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무엇보다도 트럼프의 벼랑 끝 전술에 휘말리지 말고 이젠 플랜 B를 짜야 한다. 한미 FTA가 NAFTA 다음 순서일 것이란 예단을 버리고 지금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상대가 초조해할수록 우리는 느긋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단, 우리에게 한미 FTA는 좋은 협정이었고 그래서 일획일점도 바꿀 수 없다는 기존의 포지션은 접는 대신 폐기한다면 누가 더 손해인지 냉정히 계산해 보자고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손해 볼 게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을 냉정히 직시하자. 이는 양국간 비대칭적 관세구조가 말해준다. 트럼프의 초미의 관심사인 자동차의 대미수입관세는 8%, 미국의 대한수입관세는 2.5%다. 한미 FTA 발효 후 37.1% 증가한 미국 승용차의 대한수입에 차질을 빚게 되면 누가 손해인지 물어보자.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방법론을 동원해 한미 FTA 폐기시 우리의 손해가 막심한 듯 발표했던 모 연구기관의 보고서는 비판적 시각에서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우리의 주요 경쟁국인 일본도 중국도 아예 미국과의 FTA가 없다.
물론 한미 FTA가 폐기되면 우리에게 아무런 손해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 미국 요구에 응하겠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야말로 트럼프가 노리는 바다. 그러니 트럼프식의 벼랑 끝 전술에 겁먹지 말고 우리도 폐기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대북공조도 시원찮을 판에 미국의 비위를 건드렸다며 이제라도 내줄 건 내주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우린 트럼프야말로 미국 내에서조차 비판이 제기될 정도로 안보동맹에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폐기 수순을 밟는 것이 온당한 것이냐고 맞받아치자. 이럴 땐 국내의 한미 FTA 반대여론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위위구조’ 전술을 활용하자
손자병법의 승전계에 나오는 제2계는 ‘위위구조(圍魏救趙: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 즉 강적을 만났을 때는 정면승부를 피하고 상대의 약한 틈을 공략하라는 뜻이다.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정면충돌을 할 경우 자칫 우리의 손실이 클 수 있다. 다음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위위구조 전술로써 활용할 만한 점들이다.
첫째, 필자는 그가 취임 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탈퇴, EU(유럽연합)와의 FTA(TTIP·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 보류, NAFTA 폐기 운운 등 강공을 펴면서도 이들 협정 참가국들과의 양자간 협정을 선호하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러한 메가 FTA에서는 자국이 다수 협상 참가국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에 자국의 거대 내수시장과 국제무대에서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무기로 과거 미국이 양자간 협정 체결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경쟁적 자유화(competitive liberalization)' 전략을 구사해 상대국과 1:1로 마주 앉아 최대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 전략을 통해 TPP, NAFTA를 폐기시킬 경우 그 참가국 중 일부와의 양자간 협정이란 대체재가 존재하나 한미 FTA의 경우는 이미 양자간 협정이라 대안이 없다. 더욱이 한미 FTA는 미국이 21세기형 협정이라 상찬했던, 아태지역의 미국화를 추구한 TPP의 근간이 되었다. 폐기되면 누가 더 아쉽겠는가.
둘째, 미국 내 우군을 창의적으로 만들자. 한미 FTA가 폐기되면 이를 계기로 개정된 66개의 법령 중 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원상복귀시키자. 특히, 미국산 자동차 수입을 확대하기 위해 조세주권 침해라는 법조계 반발도 무릅쓰고 미 자동차업계의 해묵은 숙원사업을 들어준 한미 FTA 제2.12조 3항(“대한민국은 차종간 세율의 차이를 확대하기 위하여 차량 배기량에 기초한 새로운 조세를 채택하거나 기존의 조세를 수정할 수 없다.”)가 사라진다. 이래도 미국 자동차업계가 폐지를 원할까. 개정 법령 중 법률 기준 24건의 최대인 9건을 차지하는 지식재산권 보호수준 강화는 대미 지식재산권 수입증대를 촉발시켰다. 이것이 사라지는데 미국 제약업체 등 고기술 첨단산업계도 찬성할까. 이들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어떤 경우든 우리에게 유리하다. 자, 이제부터는 김현종 본부장이 유감없이 발휘할 승부사 기질을 기대해 본다.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
◎ Weconomy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 Weconomy 페이스북 바로가기: https://www.facebook.com/econoh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