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격서? 성동패서!
“트럼프가 ‘끔찍한 한미 FTA’에 대해 1승을 거뒀다.(Trump scores first win on ‘horrible’ South Korea trade agreement )”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10월5일치 기사제목이다. 누가 봐도 트럼프가 ‘미치광이 전략(crazy strategy)’으로 따낸 첫 승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개정을 원치 않는다고, 한미 FTA 영향평가를 위한 공동연구가 우선이라고, 미국의 한미FTA 공동위원회 개최에는 응하지만 개정은 우리가 합의해야 가능하다고, 폐기도 가능한 옵션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당당히 국익을 지키겠다고도 했다.
그러다 10월 4일 하필이면 추석날에 우리 국민에게 원치 않는 명절선물을 안겼다. 2차 한미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가 개최된 워싱턴에서 ‘사실상’ 한미 FTA 개정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보낸 것이다. 공동연구가 먼저라던 정부의 주장은 워싱턴에서 마주 앉아 우리 자체 분석결과를 내보이는 용두사미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것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초대 본부장이 되어 취임일성으로 강조했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인가? 차라리 성동패서(聲東敗西)라 해야 하지 않나. 이번에 성동격서 전략으로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자는 아쉽게도 김현종 본부장이 아니라 트럼프였다. 그는 캐나다와 멕시코에도 여보란 듯 경고장을 보내는 ‘일석이조’를 얻었다. 그런데 의외로 국내에선 이에 대한 반발은커녕 이해 못할 침묵이 흐르고 있다. 이에 필자라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첫째, 무기력하게 백기투항한 이유가 뭔가? 정부는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폐기 서한까지 작성하려고 했다. 폐기위협이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 엄포가 아닌 것 같다”는 김현종 본부장의 발언이 그 이유를 에둘러 설명하는 것인가.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폐기 카드를 들었다 놨다 했으니 그의 미치광이 전략은 우리 정부가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 아닌가. 백번 양보해 그의 폐기카드가 으름장이 아니라 실질적 위협임을 뒤늦게 알았다 치자. 10월5일 미국 통상 전문지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가 전하듯 한국이 양보하지 않으면 북핵 위기 앞에서 한미공조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치자. 그래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양보할 수밖에 없는 당사자는 반드시 한국이어야만 하나. 트럼프의 집요한 한미 FTA 흔들기는 합리적인 논리보다 자국내 정치 논리에 기반한 생떼와 횡포에 가까운 것인데 그렇게 쉽게 받아줘야 하나.
김현종 본부장은 ‘트럼프가 한미 FTA 폐기 서한을 쓰려했다’에서 마침표를 찍을 게 아니라 그 뒤에 ‘가, 하지 못했다’까지 읽어야 했다. 즉 폐기 직전까지 갔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폐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함의하는 바를 간과한 게 아닌가. 그가 폐기까지 이르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는 맥 매스터 백악관 안보보좌관, 짐 매티스 국방부 장관 그리고 개리 콘 국민경제위원회 위원장 등 최측근 참모들이 말렸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승부사 트럼프도 그들의 만류를 뿌리칠 수 없었거나, 그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포장하라고 지시한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어쩌면 의도적으로 만류당할 상황을 연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전략에 우리는 말려들었다. 미 의회와 행정부 안에도 이성적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이들은 분명 있다. 이들은 한미 FTA가 미국에 손해는커녕 농축산물과 서비스 부문에서 큰 이득을 주는 협정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관련 업계가 하나같이 트럼프에 폐기반대를 엄중히 외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대북공조가 긴밀히 요구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트럼프의 횡포가 미국의 동맹들에게 그릇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트럼프가 한미 FTA를 폐기한다면 누가 더 손해고 누가 더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받게 될까? 그럼에도 도대체 우리 정부는 뭐가 그리 두려운 건가. 미국이 한미 FTA에서 한국의 양보를 받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한반도의 전쟁위기에도 모른척 할까봐 걱정인가? 한미 FTA 폐기되면 한국이 엄청난 손실을 입을까 걱정인가?
협상팀이 두려워할 대상은, 트럼프가 아니라 우리 국민이다. 정부가 가장 소통에 힘써야할 대상은, 백악관과 미국 협상팀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다. 정부는 한미 FTA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국내 이해관계자에, 국회에 그리고 일반 국민에게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정부는 2007년 당시 미국의 압박에 못이겨 재협상은 있을 수 없다더니 굴욕적으로 재협상에 나섰던 것처럼, 또 다시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엄동설한에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미국에 분명히 각인시켜야 한다. 그러니 트럼프가 두려워할 대상은, 우리 협상팀의 든든한 지원군인 촛불시민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미 FTA 레드라인은 무엇인가?
결국 이르면 내년 초 양국 협상팀은 개정협상 테이블에 앉을 전망이다. 미국 쪽이 금번 2차 공동회기 이후 공개한 USTR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개정협상 자리에서 미국 쪽은 협정문 개정(amendments)만이 아닌 수정(modifications), 그리고 협정문의 이행(implementations) 등 트럼프가 원하는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그 모든 것을 다 다루기를 원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다. 김현종 본부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 FTA 협상에 임하는 자신에게 당시 경제외적 요소는 배제하고 철저히 장사꾼의 입장에서 협상에 임하라고 주문했다고 회고한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협상철학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우리 협상팀에 한미 FTA 레드라인은 무엇이라고 주문하려는가? 여전히 한미 FTA는 윈윈이니 그대로 두자고 할 것인가? 김현종 본부장이 이끄는 협상팀은 지금도 한미 FTA는 우리에게 이로워 현상유지가 좋으니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면서도 미국측 강요에 못이겨 개정협상 테이블에 나서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한미 FTA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에서 빼내어 자유롭게 하자. 실은 우리도 그에 불만이 많아 개정의향이 있다고, 여차하면 폐기도 불사한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폐기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실은 진작에 그래야 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출구를 마련해 두었다면 정부도 국민도 추석날 볼썽사납게 체면 구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냉정히 계산해 보자. 시간은 우리 편이다. 서두를 것 없다. 트럼프는 내년 11월의 중간선거까지 뭔가 실적 만들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이 의회로부터 통상협상권한을 위임받은 무역촉진권한(TPA)은 내년 7월1일 종료된다. 미국뿐 아니라 멕시코도 내년에 대선이 있고 캐나다 지방선거도 내년 하반기에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 또한 연내 합의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의 원산지규정, 노동 기준, 투자분쟁 등에서 별 진척이 없다. 한편 우리는 합법적인 통상절차법에 의거하여 한미 FTA 개정협상에 대한 영향평가를 수행하고 우리의 협상목표를 수립하며 레드 라인도 설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국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은 말할 나위 없다.
한미 FTA는 소득주도성장과 공존할 수 있는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현 정부는 한미 FTA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의 FTA 정책이 소득주도성장전략과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가? 바꿔 말하자면 우리에게 한미 FTA의 과거는 무엇이었고, 현재는 무엇이며 그리고 미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한미 FTA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포함하여 한국의 FTA 정책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한미 FTA를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FTA 정책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경제영토 확장’이라는 중상주의에 토대를 두고 수출증대에 방점을 찍는 이른바 ‘수출주도(이윤주도) 성장전략’의 총화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서비스산업 발전 도모, 지식재산권 보호 수준 강화를 위시한 규제완화와 개방을 통한 외국인투자 유치 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이윤주도 성장전략이자 혁신성장의 외연확대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것이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담은 소득주도성장전략과는 공존 가능할까. 즉 1960년대의 경제개발 이래 외환위기 이전까지 지속된 투자 및 수출주도 체제의 강고한 경로의존성을 깨고 임금주도(내수주도) 체제로 한국경제의 성장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대외부문과 별개로 가능할지 묻고 싶다.
1억2천만명 인구로 세계 11위 내수시장의 멕시코는 NAFTA 발효 이후 지난 23년간 역내에서 미국이나 캐나다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고자 인위적으로 임금인상을 억제해 왔다. 그로 인해 금번 NAFTA 재협상 테이블에서 멕시코는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노동 기준 강화를 매개로 한 임금인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멕시코는 임금인상을 주저할까? 수출주도성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단 멕시코같은 저임금국에만 해당될까. 그렇지 않다. 일본 또한 멕시코와 비슷한 세계 10위 인구에 소득수준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다. 그런 일본조차도 버블붕괴 이후 침체된 내수로 기업은 수출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저임금과 비정규직에 매달렸다. 수출주도 체제에서는 수출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수출증대로 인한 기업이윤이 임금을 통해 가계로 환류되지 않아 내수가 침체되어 다시 수출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제 일본은 2016년부터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축을 전면에 내세운 2단계 아베노믹스에 돌입했으나, 이미 고착화된 수출주도성장전략의 궤도수정은 결코 쉽지 않다. 임금주도 수요체제의 성장 가능성을 주장하는 포스트케인지안의 기대와 달리 현실은 냉혹함을 방증한다.
우리보다 훨씬 큰 내수시장을 지닌 멕시코나 일본도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에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초유의 실험이 유의미한 결실을 맺는 것은 녹록치 않다. 기왕에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자 한다면 국내부문에 그칠 게 아니라 대내외를 통합한 정치한 정책 및 제도 설계가 긴요하다. 당면한 최대 현안인 한미 FTA 개정협상에 임하고자 한다면 응당 한미 FTA도 이런 시각에서 돌아보아야 한다.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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