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투자계획이 많았지만 미국산 제품 구매도 꽤 포함돼 있었다. 우리 기업들이 현지투자 관련 각종 규제 등 애로사항 해결도 전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떠난 8일, 아침 7시 서울 롯데호텔에서 미국 백악관 주요 인사들과 우리나라 대기업 임원들이 모여 투자 계획과 구매 등을 논의했다. 미국 쪽 참석자는 에버렛 아이젠스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부위원장, 수전 손턴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대행, 디나 파월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 부보좌관 등 경제·안보 참모들이 참석했다. 우리 쪽에선 에스케이(SK)·한화 등 미국에 투자하거나 셰일가스 등 구매 계획이 있는 10여개 주요 대기업 임원이 함께했다. 회의는 비공개로 급히 열렸고, 미국 쪽은 내용이 바깥에 새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석 기업들은 구체적인 현지 투자와 제품 구매 계획을 밝혔고, 미국 쪽은 투자·구매 금액과 일정을 받아 적은 것으로 알려진다. 정식 계약 체결 이전에 당사자 간 실행을 확약하는 일종의 ‘양해각서’를 확인한 셈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조사한 결과, 앞으로 5년간 대미 투자계획은 42개 기업에서 총 173억달러, 미국산 제품 구매 계획은 24개 기업에서 575억달러(에너지 228억달러 포함)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 쪽은 “지난 6월 말 열린 한-미 정상회담 당시에 조사한 대미 투자·구매 계획에 더해 실행 시기를 앞당기거나 추가된 계획들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방한 때 통상 분야에서 예상과 달리 ‘민감한’ 언급을 애써 피하며 온화하게 표현했지만,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무기는 물론 셰일가스·액화천연가스(LNG) 구매 등에서 ‘확답’을 받는 식으로 실익을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7일 저녁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 만찬 테이블에 재계에서 삼성·현대차·한화·풍산·에스케이·한진 등이 참석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무기 구입과 관련된 것인지 (한화·한진·풍산 등) 방산업체에서 많이 참석한 게 눈에 띄었다”며 “양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 개시에 합의한 만큼 관련 언급은 전략적으로 자제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신 △무역적자를 당장 줄일 수 있는 무기·에너지 구매 △미국 일자리 창출과 무역적자 감축 효과를 동시에 거둘 수 있는 현지 투자를 확약받은 뒤 떠난 셈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통상장관 회담은 정상회담과 함께 열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열리지 못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 쪽이 통상장관 회담을 가지려고 적절한 시간대를 찾아봤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동 일정이 늦어지면서 결국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자유무역협정이 자국에 유리하게 개정되더라도 그 이익이 장래에 실현될지 불확실한 ‘약속어음’이라고 여기고, 당장 현금이 오가는 투자·구매 확답을 받아 가는 전략을 짠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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