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국 전력소비량 지표. 한국은 상위 10개국 중 8위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자주 찾는 에너지통계 2017’·국제에너지기구(IEA) 보고서 갈무리
“한국, 전력소비 세계 8위”, “1인당 전기사용량 증가세,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르다.”
폭염으로 푹푹 찌는 날씨, 이런 기사 제목을 보고 아리송하신 적 없으신가요? 정작 우리는 전기요금 ‘폭탄’을 맞을까봐 집에서 에어컨을 켜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언론에선 도대체 왜 우리가 전력을 많이 쓰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지 의아하실 겁니다.
‘더(the) 친절한 기자들’에서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봤습니다.
먼저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지난해 펴낸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2015년 기준 연간 534TWh(테라와트시)의 전력을 사용해, 실제로 전 세계에서 8번째로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국가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많은 전력을 소비한 나라는 중국(5593TWh)이고, 미국(4129TWh), 인도(1127TWh), 일본(999TWh)이 뒤를 잇습니다.
주황색이 가정용 전력 소비량이다. 국가에너지통계종합정보시스템(KESIS) 갈무리
1인당 전력소비량을 기준으로 봐도 한국은 OECD 평균을 뛰어넘습니다. 역시 IEA의 ‘주요 세계에너지 통계’(Key World Energy Statistics)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1인당 전력소비량은 2015년 기준 1인당 1만558kWh(킬로와트시)로 OECD 평균인 8016kWh보다 높습니다. 아이슬란드(5만 5054kWh)와 미국(1만 2833kWh)을 제외하고 호주,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주요 국가보다도 많은 전력소비량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2010년 이후 전력 수요가 줄어드는 추세인데 견주어 한국은 1인당 전력소비량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과 일본의 2010년 1인당 전력소비량은 1만 3361kWh, 8399kWh입니다. 2015년에는 각각 1만 2833kWh, 7865kWh로 줄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 동안 9851kWh에서 1만 558kWh로 늘어났습니다. 난방의 경우 전기보다 도시가스나 석유를 쓰는 경우가 많고, 가전제품으로 쓰는 전기도 그리 많지 않은 한국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요?
■ 범인은 대기업이 새벽에 쓰는 전력이다
그 비밀은 산업용 전력소비에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가정용 전력소비는 OECD 평균의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2016년 한국전력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3년 한국의 1인당 가정용 전력 소비량은 1274kWh로 OECD 평균(2324kWh)의 54.6%에 불과합니다. 34개 회원국 가운데는 26위로 하위권입니다. 반면 산업용 전력 소비량을 포함할 경우 전체 전력 소비량 순위가 8위로 올라갑니다. 산업용 전력소비량이 가정용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죠. (
▶관련기사 : 한국 가정용 전기 소비, OECD 절반 불과)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부문별 전력 소비량. 검은색이 산업용
에너지경제연구원 자료를 토대로 지난해 여름 소비량을 견주어보면, 7월 산업용 전력 소비량은 2만 3629 GWh(기가와트시), 가정용은 5736GWh입니다. 8월 산업용 전력 소비량은 2만 3412GWh, 가정용은 6973GWh입니다. 산업용 전력 소비량이 3∼4배가량 많은 셈이죠. 더구나 산업용 전기는 누진제도 적용받지 않고 가격도 저렴합니다. 전문가들이 에너지 절감 정책의 핵심은 바로 이 산업용 전력 요금을 손질하는데 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새벽시간대에 사용하는 ‘경부하 시간대 요금’은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기업에 판매하고 있어 이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옵니다. ‘경부하 요금’은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사용하는 전기에 대한 요금을 말하는데요,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 국정감사에선 “한국전력이 최근 5년 동안 경부하 시간대 전력을 구매 단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해당 시간대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상위 10개 기업에 1조 659억원에 달하는 전기요금 할인혜택을 줬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특히 산업용 을종(계약전력 300kW 이상인 경우 적용) 요금의 경우 최근 5년 한전이 구입하는 평균 구매단가가 77.52원인 반면, 상위 10개 기업에 판매한 평균단가는 67.14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약 10.38원씩 한전이 손해받고 팔고 있다는 얘깁니다. 전력 판매량이 많을수록 한전의 손실이 커지고 이 손실은 결국 다른 시간대에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경부하 시간대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기업은 대부분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입니다. 산업구조상 24시간 내내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대기업일수록 전기요금에 있어서 특혜를 입게 되는 구조란 뜻입니다.
국회 예산정책처도 산업용 전기 요금이 지나치게 저렴한 점을 꼬집습니다. 예산정책처가 펴낸 ‘전력가격체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보고서(2013년)는 “원가에 비해 과도하게 낮은 경부하 요금은 에너지 소비의 왜곡을 유발할 수 있다”며 “공급예비율이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원가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경부하시간대 요금을 상향조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산업용 전기요금 현실화는 쉽진 않아 보입니다. 기업의 거센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는 애초 산업용 전기요금을 연내 조정하겠다고 밝혔다가 지난달 16일 “속도 조절을 하겠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최근 경제 지표가 나빠지자 기업 쪽 입장을 들어줬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산업부 관계자는 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산업용 전기요금을 현실화한다는 방침은 변함없다”면서도 “기업 여건을 같이 봐야 하다 보니 시기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올해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관련기사 : 백운규 산업부 장관 “산업용 전기요금 연내 조정안해”)
■ 가정용 전력 누진제 폐지, 만능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물음표는 남습니다. “가정용에만 적용되는 누진제는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누진제를 완전히 폐지할 순 없나요?” 궁금하실 겁니다.
정부는 이미 2016년 12월 ‘6단계, 최대 11.7배’에 이르던 누진제를 ‘3단계, 최대 3배’로 한 차례 손질한 바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산업부는 다시 한 번 전기요금을 개편하는데 신중한 모습입니다. 산업부 관계자는 “(개편된) 제도가 실제로 요금 부분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형평성이 있는지, 경제적으로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면서도 “폭염에 따른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7∼8월 전기요금을 한시적으로 인하하거나, 겨울철 취약계층의 난방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급하는 ‘에너지 바우처’를 폭염이 심한 여름에도 지급하는 것이 대안으로 거론됩니다. (
▶관련기사 : 2년전 누진제 손봤는데…폐지 청원 봇물에 정부는 ‘진땀’)
‘누진제 폐지’ 여부는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누진제를 완화할 경우 전기사용량이 적은 가구는 전기요금이 인상되는 반면 전기사용량이 많은 가구 요금이 오히려 하락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같은 보고서에서 누진제를 완화할 경우 전기요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분석했습니다. 2012년 주택용 전기요금 평균 판매단가인 124.6원/kWh을 기준으로 한전의 판매수익이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가정했을 때 결과입니다. 이 분석 결과를 보면, ‘단일요금제’로 변경할 경우 150kWh를 쓰는 가구의 전기요금은 기존 대비 6550원이 오르는 반면 601kWh를 쓰는 가구는 오히려 3만 3470원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전력을 많이 쓰는 가구가 혜택을 볼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다만 현행 누진제의 한계도 뚜렷합니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계일수록 전기도 적게 소비하기 때문에 누진제는 저소득층에게 유리하다”는 주장과 달리 소득이 적더라도 가구원 수가 많을 경우 전기사용량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가구 규모·소득 규모별 전기요금 현황(2012년)을 살펴보면, 소득이 최저생계비 5배 이상으로 상대적으로 고소득자면서 1인 가구인 경우 전기사용량은 228kWh인 반면, 최저생계비 미만이면서 5인 이상 가구의 전기사용량은 368kWh로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기를 적게 쓰는 가구=저소득층’이라는 전제가 틀렸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예산정책처는 “과도한 누진적 요금체계는 원가와의 연계성을 훼손해 소비 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 또 도시가스나 열, 석유류에서는 누진적인 요금이 적용되지 않는데 반해 전기에만 예외적으로 과도하게 높은 누진제를 적용해야 하는 근거도 취약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누진제를 완화하더라도 오히려 전기요금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는 저소득층 가구에 대해 별도의 에너지 복지 지원제도를 먼저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