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국내외 금융시장이 최근 한달여간 극도로 불안한 양상을 보였다. 지난주부터 차츰 안정세를 되찾고는 있지만 세계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어 앞으로도 크게 변동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금융시장 불안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기업어음(CP) 등 단기자금시장이 신용경색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주가 폭락에 더 큰 관심을 가지지만, 기업·기관투자자 등은 단기자금시장의 하루하루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하루 또는 1~3개월 단위로 단기 운용자금을 조달하거나 투자하는 이 시장이 경색되면 자금조달 비용이 급증하거나 심지어는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부도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탓이다.
단기자금시장은 어떤 곳?
국내 단기자금시장은 과거에는 은행간 거래인 콜시장이나 양도성예금증서(CD) 거래가 주를 이뤘지만 최근 10년 사이 기업어음과 전자단기사채(전단채) 거래 중심으로 재편됐다. 기업어음은 신용상태가 양호한 기업이 상거래와 관계없이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융통어음이다. 상거래에 수반돼 발행되는 상업어음(진성어음)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법적으로는 상업어음과 같은 약속어음으로 분류된다. 담보나 공시의무가 없는 등 발행 절차가 간편하고 금리 면에서도 은행 대출보다 유리하다. 전단채는 실물이 아닌 전자적으로 발행·유통되는 단기금융상품으로 2013년 1월 도입됐다. 법적 성격은 어음이 아닌 사채권이지만 경제적 실질은 기업어음과 동일하다. 전자적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발행 당일에 자금을 사용할 수 있고, 발행내역이 예탁결제원 홈페이지에 공개되기 때문에 투명성도 갖추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기업어음과 전단채 시장 규모는 발행잔액 기준으로 지난달 말 현재 약 246조원에 이른다. 기업어음과 전단채 발행잔액이 각각 188조원, 58조원 수준이다. 기업어음은 다시 일반 기업어음과 자산유동화 기업어음(ABCP)으로 나뉘는데, 일반 기업어음의 발행잔액이 64조원이다. 주목되는 것은 일반 기업어음 발행잔액의 64%, 전단채 발행잔액의 59%가 금융회사들이 발행한 점이다. 이 시장이 경색되면 가장 크게 타격을 입는 곳이 금융부문이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과거 금융위기의 경우 대부분 단기자금시장에서 위험의 전이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위기 상황에서 기업도산은 대개 회사채시장이 아니라 단기금융시장에서 시작된다”며 “회사채시장에서 부도가 발생하기 이전에 기업어음·전단채 시장에서 먼저 기업부도가 발생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후 회사채시장으로 급속히 전이된다”고 말했다. 기업어음·전단채 시장에서는 짧은 만기라는 특성으로 인해 만기가 주로 3~5년인 회사채시장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진 이후에도 자금조달이 가능한 경우가 흔히 관찰되는데, 이렇게 단기성 자금으로 연명하다가 신용경색으로 이마저도 불가능해지면 위험이 빠르게 확대된다는 얘기다.
최근 어떤 일이 벌어졌나?
단기자금시장의 신용경색 여부를 볼 수 있는 잣대는 금리 추이를 살피는 것이다. 기업어음(91일물) 금리는 올해 3월 중순까지만 해도 연 1.5~1.6%대에서 안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 금리는 3월 16일 1.53%에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한 하루 뒤인 17일 1.36% 내려갔다가 18일 상승 반전해 오름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가장 먼저 이를 반영해야 할 단기자금시장 금리가 거꾸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26일에는 2.04%를 기록해 2015년 3월 이후 처음으로 2%대를 돌파했다. 이는 같은날 2.035%를 나타낸 3년만기 무보증 회사채(AA- 등급 기준) 금리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흔히 장기물 금융상품은 만기 부담 때문에 단기물보다 금리가 높게 형성되는데, 91일짜리 금리가 3년짜리 금리보다도 높아진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 금리는 4월2일 2.23%까지 올라갔다가 하락해 8일 현재 2.18%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3년만기 회사채 금리보다 높다.
단기자금시장이 경색을 보인 것은 국제금융시장 불안으로 대부분 기관들의 현금 보유 욕구가 강해진 상황에서 증권사·정유사 등 기업어음을 발행하는 업체들이 많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기업어음을 사려는 투자자는 거의 없는 데 비해 이를 발행하려는 업체들이 많아 수급이 꼬인 것이다. 증권사들에 대한 불신도 한몫했다. 증권사들은 해외 주요 지수 폭락 여파로 주가연계증권(ELS)에 대한 마진콜(추가 증거금 납부 요구)이 들어온 데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 기업어음(ABCP) 문제까지 불거졌다. 자산유동화 기업어음은 증권사가 부동산 개발사에 대출을 해준 뒤 대출 채권에 지급보증을 해서 신용도를 보강해 발행하는 증권인데, 이 증권이 차환이 잘 되지 않자 증권사가 이를 떠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증권사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자체 기업어음을 발행하거나, 보유 중인 다른 기관의 기업어음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다행히 정부의 금융시장 안정대책과 한은의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방침 발표 등에 힘입어 단기자금시장은 차츰 안정을 되찾는 분위기다. 아직 불안한 상태지만 자금이 돌기 시작하는 징후가 보인다. 김상훈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채권 담당)은 “4월1일부터 7일까지 23조3천억원의 기업어음·전단채 만기 물량 중 대부분이 상환 또는 차환됐다”며 “금리는 여전히 높지만 단기시장의 차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현 기자
hy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