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3사가 탈통신을 외치기 시작한 10여년 전 서울 용산구 전자상가 일대 3개 이동통신가입 대리점 앞 모습.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제4 이동통신 사업자에 버금가는 ‘메기’가 등장했다”, “금융위원회가 은행의 알뜰폰 시장 진출을 사실상 허용한만큼 은행들의 알뜰폰 시장 진출이 잇따를 것이다”, “이동통신사 가입자 이탈이 우려된다”,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이 고사할 수 있다”….
케이비(KB)국민은행이 금융위원회 승인을 받아
알뜰폰 사업을 본격화한 것에 대한 통신사 쪽의 물밑 반응들이다. 앞서 케이비국민은행은 규제샌드박스 특례를 적용받아 ‘리브모바일(리브엠)’이란 이름의 알뜰폰 사업을 4년 일몰 조건으로 시작했는데, 이번 승인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알뜰폰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소비자·시민단체·정치권은 “두터운 고객층과 자금력을 앞세운 은행의 알뜰폰 시장 진출이 이동통신 3사가 독과점 중인 이동통신 업계에 ‘메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에스케이텔레콤(SKT)·케이티(KT)·엘지유플러스(LGU+) 등 이동통신 시장을 독과점 중인 통신 3사는 금융위의 국민은행 알뜰폰 사업 승인과 관련해 논평 보도자료 등을 내지는 않았다. “직접 알뜰폰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공식적으로 의견을 내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대신 각 사 홍보담당자들이 언론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는데, 속내는 리브모바일에 ‘족쇄’를 채워달라는 거다. 통신 3사 수준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권 알뜰폰 사업자들이 손해를 감수하고도 원가 이하 요금제를 출시하면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이 고사상태에 이를 수 있다.” 소비자·시민단체·정치권 쪽의 이동통신 요금인하 요구를 가로막는 ‘입술’(이가 시리지 않게 하는 보호막)로 활용해온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을 이번에는 금융권 알뜰폰 사업자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지렛대로도 쓴 것이다.
뒤집어 보면, 통신 3사의 행태는 뻔뻔하기 그지없다. 사실 통신사들은 국민은행과
토스(토스모바일) 등의 알뜰폰 시장 진출에 할 말이 없어야 한다.
■ 통신 3사 “탈통신” “탈통신” “탈통신”
통신 3사는 10여년 전부터 ‘탈통신’을 외쳐왔다. 케이티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디지코’ 전략을 앞세웠는데, ‘탈통신’이라고 설명했다. 에스케이텔레콤 역시 탈통신을 외치며 인공지능·반도체·보안·콘텐츠 등으로 눈을 돌렸다. 통신사들은 말로만 탈통신을 외친 게 아니라, 통신망 고도화와 정보보호 등에 대한 투자와 요금 경쟁 등 통신사로써의 의무를 소극적으로 해왔다. 그 결과 한 때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던 통신망 품질은 이제 중하위 수준으로
떨어졌고,
통신망 장애와
개인정보 유출 사태도 잇따르고 있다. 오죽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5세대(5G) 이동통신에 대한 투자 소홀을 이유로 통신사들에게 할당했던
28㎓ 대역 주파수를 강제 회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을까.
결과적으로 통신 3사 행태는 탈통신을 외치며 방치한 이동통신 시장에 은행들이 발을 들여놓자 뭐라 하는 꼴이다. 당연히 “탈통신을 외칠 때는 언제고…”란 조롱이 안나올 수 없다.
금융권 사업자들이 원가 이하 요금제를 출시하면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이 고사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도 어설프다. 오히려 정부 관계자는 <한겨레>에 “왜곡된 알뜰폰 시장의 정체성이 바로잡히기 위해서라도 ‘사나운 메기’ 짓을 하는 사업자 등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알뜰폰의 본래 이름은 ‘가상이동통신망사업자’(MVNO·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다. 이동통신 서비스 제공에 필수적인 주파수를 보유하지 않고, 주파수를 보유한 이동통신 사업자(MNO·Mobile Network Operator)의 통신망을 빌려 독자적인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를 가리킨다. 주파수가 한정돼 여러 사업자한테 나눠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용자에 대한 요금·고객서비스 경쟁은 활성화하기 위한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통신 3사 이동통신망을 그대로 빌려 써 통신 품질은 동일하지만, 요금·고객서비스 경쟁 활성화 필요에 따라 등장한만큼, 요금이 싸다. 정부가 엠브이엔도 서비스에 ‘알뜰폰’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쉽게 부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기존 통신 3사의 이동통신 서비스에 견줘 요금이 싸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요금 경쟁을 활성화해 가계통신비 부담을 줄이면서 엠브이엔오 사업자들의 시장 안착을 돕는 취지로 이런 이름을 지었는데, 이제 와선 알뜰폰이라는 이름이 엠브이엔오 시장을 왜곡시켰고, 그에 따라 시장 확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실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용자·시민단체·정치권 쪽에서 이동통신 요금인하를 통한 가계통신비 부담 완화 요구가 쏟아질 때마다 정부가 알뜰폰 활성화 정책으로 물타기를 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는데,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고 짚었다.
■ 부르기는 쉬우나 시장 왜곡한 이름 ‘알뜰폰’
애초 엠브이엔오 시장은 괜찮은 콘텐츠나 서비스를 가진 쪽이 기존 콘텐츠·서비스에 이동통신 서비스를 더해 새로운 형태의 모바일 비지니스를 창출하는 모습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 최초 엠브이엔오 사업자로 꼽히는 영국 버진모바일은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에 특화된 음반 판매업체 버진의 자회사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이용해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 팬덤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같은 목적으로 미국에선 애니메이션 회사, 영화사, 스포츠텔레비전 등이 뛰어들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백화점과 영화 유통업체 등이 발을 들여놨다.
하지만 엠브이엔오가 저가 이동통신 서비스로 자리매김하고, 우리나라에선 알뜰폰이란 별명까지 지어지며, 이동통신 서비스와 콘텐츠·서비스가 융합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구실은 사라졌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국민은행의 리브모바일과 토스의 토스모바일 등의 등장은 엠브이엔오 시장이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시발점으로 볼 수도 있다. 엠브이엔오에 금융서비스를 얹어 새로운 금융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 동시에 이용자들에게 좀더 바짝 다가가는 금융서비스 상품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별도의 복잡한 설정이나 소프트웨어 설치 등의 절차 없이 모바일에서 바로 예금·대출·보험 서비스 등을 이용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민은행·토스 쪽에서 보면, ‘결합상품’ 형식을 빌어 일정 금액 이상 예금 고객이나 대출·보험 손님들에게 알뜰폰 단말기와 요금을 대폭 깎아주거나 면제할 수도 있다. 통신사들도 이동통신 서비스에 가입하면 자회사 초고속인터넷·인터넷티브이(IPTV) 등의 요금을 깎아주거나 면제해주고 있다. 백화점 등도 브이아이피(VIP) 고객에게 알뜰폰을 무료로 제공하며, 단말기 화면을 통해 신상 출시 소식과 할인 쿠폰 등을 실시간으로 제공해 고객들이 백화점으로 향하게 하는 모델로 엠브이엔오 서비스를 설계해볼 수 있다.
■ “진정한 MVNO 시장 개화 시기 됐다”
스마트폰 발전과 이용 대중화에 따라 이런 개념의 새 엠브이엔오 서비스 시장이 개화할 때가 됐다는 것은 통신 3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통신사 임원은 “금융사들은 물론이고 대형 백화점·병원과 자동차 회사 등도 뛰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통신이 통화·문자메시지 송수신 수단으로 쓰이던 시대는 이미 갔고, 이제는 콘텐츠·서비스 이용 단계를 넘어 일상생활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통신 사업자들의 ‘탈통신’ 행보도 이런 상황을 예상해 대응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을 들러리세워 새 엠브이엔오 사업자들의 발목을 묶으려는 이통사들의 행태에 “안쓰럽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시민단체·정치권 쪽에서도 이용자 편익 침해 예방과 가입자 개인정보 보호 책임 부과 등에 대해서는 통신 3사 수준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시장점유율 상한을 둔다거나, 과도한 요금경쟁을 제한하는 식의 구태의연한 규제는 어불성설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회 과방위 의원실 관계자는 “오히려 이 참에 콘텐츠·서비스 등을 앞세운 새 엠브이엔오 사업자들의 진입을 활성화해, 알뜰폰이란 별명과 알뜰폰으로 요금인하 요구를 가로막는 정책 탓에 왜곡된 엠브이엔오 시장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 쪽은 국민은행의 알뜰폰 사업을 승인하며 “점유율 규제가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최종적으로 판단할 사안”이라며 “금융위는 부수업무가 은행의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지 면밀히 관리·감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은행은 금융위에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과 가격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금융 서비스와 융합된 서비스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전례로 볼 때, 통신사들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달려가 ‘닥치고 규제 강화’를 요구할 게 뻔하다. 무엇보다 리브모바일도 ‘관리 경쟁’ 대상에 포함시켜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과기정통부는 그동안 통신 3사의 이동통신 시장 독과점 상황을 해소하고 경쟁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편익을 높이겠다며, 제4이동통신 사업자를 허가해 ‘메기’ 구실을 하게 할 방침까지
밝혀왔다. 이 또한 통신 3사의 탈통신을 외치며 소비자들을 내팽개쳐 불러온 상황이다.
김재섭 선임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