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 임차인들이 27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전세사기 피해자’ 김아무개씨가 집주인(전셋집 임대인) 정아무개씨가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0월 중순이다. 이미 정씨 가족들은 상속 포기를 결정한 뒤였다.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막막해진 김씨는 정씨의 또다른 세입자들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피해자 70여명이 모여, 발품을 팔고 곳곳에 전화를 걸어 정씨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처음엔 교통사고다, 질병사다, 사인을 두고 여러 말이 나돌았다. 현재 김씨가 파악한 사인은 자살이다. 숨지기 전 정씨는 43살의 나이로 240채 가까운 집을 보유했다. 지난해 4월부터 7월까지 집중 매수한 것으로 보였다. 숨지기 하루 전인 지난해 7월29일 정씨와 전세 계약을 맺은 피해자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정씨 보유 집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빌라왕’이 보유한 집과 같은 건물에 있다는 점이다. 빌라왕은 수도권에 빌라와 오피스텔 1139채를 보유한 채 전세사기를 벌이다 지난 10월 서울의 한 숙박시설에서 숨진 채 발견된 40대 김아무개씨다.
27일 세종시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자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김씨는 막막함을 호소했다. “임대인 정아무개는 명의만 빌려준 바지사장이고, 빌라왕 김아무개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임대인이 숨져 사건 자체가 안 된다고 했다. 변호사, 법무사, 전세피해자지원센터 등 곳곳에서 상담을 받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어떤 피해자의 변호사는 중도포기 선언까지 했다.”
상당수가 사회초년생인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결국 경매 절차로 들어서야 한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 등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미가입자가 보증금의 극히 일부라도 건져낼 유일한 방법이 경매다. 빌라왕 김씨의 피해자 약 1100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약 600명이 보험 미가입자로 전해진다. 이날 회견장에 나선 20대 피해자 박아무개씨는 “지난 22일 정부가 연 빌라왕 피해자 대상 설명회는 보증보험에 가입한 피해자들이 참석 대상이었다. 그 설명회에 참석해 보증보험 미가입자를 위한 설명회는 언제 할 것이냐고 물었지만 어떤 답변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유튜브 등을 통해 부랴부랴 경매를 공부하고 있는 박씨는 빌라왕 가족의 상속 포기와 경매 절차 완료까지 1년반에서 2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은행이 전세금 대출을 연장해줄지는 미지수다. 김씨가 체납한 세금 60여억원 때문에 경매가 연기될 가능성도 적잖다. 박씨는 “체납 세금 중에 전세가보다 높은 금액의 조세채권이 설정된 경우에는 경매가 이뤄지지 않고 무잉여기각 처리가 된다고 한다”며 “경매를 신청해도 기각이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증보험 가입자여도 숨진 집주인의 상속자가 연락두절이 되면 막다른 곳에 이르긴 매한가지다. 이날 회견에 나선 명아무개씨의 임대인 송아무개씨는 지난해 12월12일 숨졌다. 김씨가 전셋집 임대차 계약을 하고 1개월 뒤에 바뀐 27살 새 집주인이었다. 보일러 수리가 필요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어 부동산에 연락했다가 뒤늦게 집주인 사망 사실을 알았다. 명씨는 “허그에 보증보험 보험 이행청구를 요청했는데도 ‘상속자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말했다. ‘20대 빌라왕’으로 불리는 송씨가 보유한 주택 중 허그 보증보험 가입 주택은 46채고, 임차인이 돌려받아야 할 금액은 57억원이 넘는다.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 대표 배소현씨는 “최근 빌라왕 사건 이전에 이미 임대인이 숨진 사례가 여럿 있었는데 정부나 허그는 필요한 대책 마련이나 매뉴얼 재정비를 해놓지 않고 있었다”며 “국토교통부가 티에프를 꾸려 전세사기에 대응하겠다고 나섰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이날 국토부는 “지난 22일에 이어 1월 10일에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 대상 추가 설명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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