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주택자들이 전세보증금을 지렛대로 주택 투자를 하면서 동시에 집주인으로 민간임대를 공급하는 한국에서는 ‘매매시장 불안-전세시장 불안’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파트 단지 일대. 연합뉴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최근 정부가 확정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입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수차례 발표된 부동산 대책에도 주택 가격은 급등했고, 급기야 부동산 대책이 집값 급등의 주범이라고 믿게 된 사람들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임차인 보호를 위해 시행한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가 전세 품귀와 전세 가격 폭등을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정말 정부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걸까요. 최근 가장 인기 없는 부처, 국토교통부를 출입하는 저는 정부가 아주 오랜 기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생긴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임대차3법 이전에 한국 세입자에게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계약 갱신 여부, 임대료 증액 여부 등 세입자의 주거권과 밀접한 주요 결정 사항에 대해 집주인이 전권을 행사했습니다. ‘착한 임대인’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세입자의 주거안정이 임대차 정책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집주인 ‘인성’에 달려 있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집주인들이 주거안정의 키를 쥔 민간임대주택은 전국 595만호 정도로, 저소득층에 주로 공급되어온 공공임대 재고량 298만호(2018년 기준)의 2배입니다.
공공임대 자격 요건은 안 되고 집주인들이 공급하는 민간임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중간 소득 계층 세입자들이 ‘전세난’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왔습니다. 주택 매매 시장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전세 대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주택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집을 사기보다 전세로 거주하기를 선호하게 되는데, 수요-공급이라는 시장논리에 따라 집주인들은 전세 가격을 올렸습니다. 민간 은행이 제공하는 주택 가격 관련 통계는 실거래가가 아니라 호가 개념이기 때문에 가격 상승 시기에는 더 많이 상승합니다. 야당 시절 더불어민주당이 들고나왔던 전월세상한제는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전월세상한제 법제화가 안 되는 과정에서 차선책으로 ‘주택임대사업자 등록제도’가 도입됩니다. 임대료 안정을 위해 집주인들에게 보유세, 양도소득세를 대폭 감면해주고 임대료 5% 증액 제한을 지키도록 한 것이지요. 집주인들은 세제 혜택을 받았지만, 임차인들이 혜택을 받는지 여부는 2020년이 되어서야 처음 점검되었습니다. 민간에 내맡긴 임대차 시장에서 갭투자, 깡통전세 등 집주인들의 도덕적 해이 문제도 나왔습니다. 정부는 집주인의 전세보증금을 규제하는 대신 전세금반환 보증보험 제도를 도입해서 집주인 대신 전세보증금을 내줬습니다. 올해만 정부가 대신 갚은 전세보증금 규모가 3015억원입니다.
이번에 닥친 전세난은 직접적으로는 임대차3법의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중간 소득 계층의 주거안정을 민간에 맡겨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임대차 정책의 총체적 실패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임대차3법이 시행되면서 5% 증액 제한 적용을 받는 ‘기존 세입자’는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세난 와중에 법과 제도로 임차인을 보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임대차3법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착한 임대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집주인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집으로 부를 쌓고 대물림하는 한국에는 집주인이 아주 많습니다. 토지주택연구원 자료를 보면, 주택을
2호 이상 소유해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가구가 308만가구입니다. 자가 소유 1123만가구의 30%에 이릅니다. 2015년에서 2018년까지 1주택자가 17만가구(797만3792가구→815만2590가구) 증가할 때 2주택자 이상은 35만가구(272만
4894가구→308만1317가구)로 더 많이 증가했습니다. 다만 집주인의 저항에 세입자가 마치 도구처럼 활용되는 것은 문제입니다. 국토부 국정감사에서 ‘전세난민 홍남기님’의 사연을 전하며 임차인의 피해를 걱정한 야당 의원은 임대차3법이 임차인 보호 강화 대책이 아니라 재산권을 침해해 위헌 소지가 있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정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정부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전세보증금 상환 능력이 없는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급격하게 인상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에 전세보증금을 포함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싼 민간전세 말고 소득과 상관없이 공공이 공급하는 공공전세에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다주택자들이 전세보증금을 지렛대로 주택 투자를 하면서 동시에 집주인으로 민간임대를 공급하는 한국에서는 ‘매매시장 불안-전세시장 불안’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됩니다. 이 무한 루프를 끊는 공공성 강한 전세 대책을 위해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