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사교클럽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린 미국 드라마 '그릭'의 한 장면.
왜 남학생 문화가 여학생들에게 ‘전염’됐나?
미국 명문 펜실베이니아대학에 다니는 날씬하고 예쁜 2학년생 A는 밤 11시에 숙소로 돌아온 뒤 자신의 ‘섹스 파트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그의 파트너로부터 답문자가 왔다. “들를게.” 그들은 침대에서 소형 텔레비젼을 함께 보다가 섹스를 한 뒤 다음날 각자 학교에 갔다.
이들은 연인 사이가 아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커피 한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성적 욕구만 채우고 헤어지는 사이다. 12일 발간된 <뉴욕타임스> 주말판은 ‘훅업(hook-up)’이라고 불리는 이 신(新) 성풍속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여대생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인에게 느끼는 감정 없이 단순히 성욕만 채우는 섹스 파트너를 찾는 문화는 그동안 미국 남자 대학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남학생들이 이런 관계를 원할 때 과거 여대생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가볍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야심만만한 여대생들이 오히려 이런 가벼운 관계를 선호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원인은 미국 여대생들의 성향이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선 변호사, 정치가, 의사, 은행가 등 고소득 직종과 정부 부처 및 기업의 고위직에 도전하는 여대생들이 많이 늘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 등 막강한 여성 정치인을 비롯해 페이스북의 셰릴 샌드버그, 야후의 마리사 메이어 등 이른바 ‘잘 나가는’ 여성 기업인들이 대거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는 탓이다.
미국에서 이런 지위에 오르려면 대학 때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 연극, 공연 등 각종 클럽 활동과 대학신문 기자, 해외 인턴십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수업이 끝나면 대학신문에 실릴 기사를 작성하거나, 강당에서 노래와 춤, 연기 등 공연 연습을 해야 한다. 남는 시간은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든지 아니면 친구들과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과거 남자 대학생들이 끈끈한 인맥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 폐쇄적인 ‘사교 클럽’을 결성했던 것처럼, 미 명문대에 여대생 전용 클럽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런 탓에 이성을 만나서 차분하게 감정을 교류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취업난과 경기불황은 여대생들을 더욱 경쟁적이고 도전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들에게 대학은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는 자격, 즉 높은 학점과 리더십, 학생회 간부 활동, 인턴십 등을 갖춰야 하는 곳이다. 경쟁력 있는 학생 클럽에 가입하려면 취업 못지 않게 ‘빡센’ 인터뷰를 거쳐야 하고, 독특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야 하며, 남다른 인턴십 경험 등을 가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면 결국 졸업 뒤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다.
이처럼 냉혹한 캠퍼스 환경에서 연애처럼 성과가 불분명한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고, 그런 모험을 하려는 이들도 적다. <뉴욕타임스>는 펜실베이니아대 여대생 60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인용해 “이들이 연애를 기피하는 것은 비용-편익(cost-benefit) 분석과 같은 정교한 계산을 통해 내려진 결론에 가깝다”고 전했다. 능력 있고 성격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 뒤 성공한 남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미국 경기가 좋았던 옛날 얘기일 뿐이다.
여대생들이 명문대에 더 많이 진학하고 학업 성적도 더 뛰어난 상황에서 과거 야심만만한 남자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훅업 버디(hook-up buddies)’를 찾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미 미국 대학의 여학생 대 남학생 비율이 4 대 3으로 여학생들이 더 많고, 우등생과 박사 학위 수여자도 여성들이 더 많다. 그만큼 여대생들이 ‘출세’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20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뒤 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변하는 30대의 남자들을 고르려는 여성 특유의 신중함도 가미됐다.
당당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엄마 세대’의 교육에 영향을 받은 탓도 있다. 고등교육을 마친 엄마들은 딸들이 성장할 때 “남자에게 얽매이지 말고 자신을 위해 독립적으로 결정하라”는 말을 해왔다. 이런 가정교육은 ‘똑똑한 딸들’에게 남편과 가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여성상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훅업’ 문화가 능력있는 여성들 사이에 결혼과 가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퍼뜨려 사회의 유대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잔 패턴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남녀 구분 없이)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 중의 하나다. 30대 때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그 이전 연령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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