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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패권의 경연장이자 무덤

등록 2013-09-12 09:39수정 2013-09-12 09:40

중동 대전 <2>
영국-소련 격돌 이어 미국-소련 격돌 ‘소용돌이’
이슬람주의자에겐 현대판 헤지라 ‘운명 전환점’
서기 622년 9월 어느날.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난다. 메카에서의 박해를 피해를 추종자를 거느리고 메디나로 향한다. 이슬람에서는 이를 헤지라라 부른다. 이슬람력의 원년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을 원년으로 , 불교는 석가의 깨달음을 원년으로 삼는다.

이슬람이 이들 종교와 달리 헤지라를 원년으로 삼는 것은 이를 중심으로 역사가 전환했고, 무슬림들에게 운명의 전환점이 됐기 때문이다. 그 사건으로 이슬람에서 ‘움마’라는 무슬림 공동체가 탄생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슬람이 비로소 한 사회를 규율하는 원리로 자리잡은 것이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은 전후 현대사와 현대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전환점이었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싸우면서, 그 세력을 확장했다. 소련은 이 전쟁이 붕괴 원인의 하나가 됐고, 미국은 아프간에서 자신들이 도왔던 이슬람주의 세력과 맞서게 된다. 1979년 12월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의 장갑차가 길가에 늘어선 아프간 주민들을 지나면서 진공하고 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은 전후 현대사와 현대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전환점이었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싸우면서, 그 세력을 확장했다. 소련은 이 전쟁이 붕괴 원인의 하나가 됐고, 미국은 아프간에서 자신들이 도왔던 이슬람주의 세력과 맞서게 된다. 1979년 12월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의 장갑차가 길가에 늘어선 아프간 주민들을 지나면서 진공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주의 냉전 대체하는 새로운 갈등 구도 싹터 

1979년 아프가니스탄은 현대 이슬람주의자에게 헤지라이자, 메디나이다.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은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북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아대륙 북단까지 이슬람 세계를 건설했다. 현대 이슬람주의자들도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이슬람주의에 바탕한 이슬람 신정 공화국을 만들고, 또 아프가니스탄을 통해서 이슬람주의를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산시킨다.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기 전에 신으로부터 또 한번의 계시를 받는다. 탄압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현대 이슬람주의자들도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면서 탄압하는 사람들과의 본격적 무장투쟁을 다짐한다.

무함마드와 무슬림들을 메디나로 불러들인 것은 메디나의 분쟁이었다. 메디나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분쟁을 중재하고 종결해달라고 무함마드를 초청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불러들인 것은 아프간의 분쟁이었다. 이 분쟁을 만든 소련과 미국이 이들을 초청했다. 차이가 있다면, 메디나의 부족들은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무함마드의 이슬람 세계 건설에 협력한 반면, 이슬람주의자들과 이들을 부른 미국 등 서방은 아직도 투쟁중이라는 것이다.

헤지라 이후 세계에는 새롭게 출연한 이슬람 세력과 유럽 기독교 세력과의 대립과 갈등 구도가 그어진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이후 서방은 다시 이슬람주의라는 세력과 갈등과 대립에 들어간다. 서방 세계에서 기원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냉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갈등과 대립 구도가 싹튼다.

1차 땐 영국이 참패해 제국 붕괴 가속화…2차 땐 소련이 영국꼴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주의 경연장이자 무덤이었다. 19세기 유라시아 대륙의 식민지 최후 패권을 놓고 격돌했던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였다.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과 북상하려는 대영제국이 충돌한 지점이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미리 견제하려는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끔찍한 패배를 맛보았다. 러시아는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을 극동으로까지 확장하다가, 결국 20세기초 러일전쟁에서 치욕적 패배를 맛보며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도 현대판 제국주의 세력의 경연장이자 무덤이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미국과 소련의 현대판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였다. 이번에는 러시아 제국의 후예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끔찍한 패배를 겪는다. 이는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된다. 반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패배를 사주하기 위해 지원했던 이슬람주의 세력의 위협 앞에서, 지금 안보위기를 겪고 있다.

19세기 아프가니스탄에서 격돌한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과 러시아라는 두 제국주의 세력의 무한 세력 확장과 이에 기반한 전략적 오판의 결과이자 참사였다. 영국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통해서 당시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까지 넘본다고 오판하고 과잉대응했다. 러시아 역시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흑해 등 바다로 나가는 자신들의 남쪽 출구를 봉쇄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20세기 아프가니스탄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현대 제국들의 무한 세력 확장과 이에 기반한 전략전 오판의 결과이자 참사였다.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최고 전략적 자원인 석유가 묻힌 페르시아만까지 영향력을 확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서 자신들의 중앙아시아 내 이슬람계 자치공화국을 묶어서 현대판 오스만터키 제국 결성을 사주한다고 오판했다.

두 제국의 서로에 대한 전략적 오판은 모두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다. 이 비극은 1979년 12월25일 새벽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는 소련군 기계화사단 탱크의 굉음과 함께 시작됐다. 전후 현대사를 바꾸는 거대한 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반소-이슬람 세력 저지하러 갔다가 되레 친소정권 수반 제거  

12월25일은 예수가 태어난 기독교 세계의 최대 성일 크리스마스이다. 현대의 이슬람 세계를 격동시키고,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숙제를 던진 대사건이 이날 벌어진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날 새벽 소련군 40군은 아프간 접경 테르메즈 인근의 아무다르야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탱크들도 뒤를 이었다. 소련군 40군은 2차대전의 승패를 가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부대이다. 2차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패배와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위대한 붉은 군대‘의 40군이 주변국의 침공군으로 나선 것이다. 하루 전인 크리스마브 이브, 어둠이 깔리면서 소련의 안토노프 수송기들도 공정부대 병력들을 싣고 아프간의 수도 카불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앞서 아프간 땅에 발을 디뎠던 소련 정보기관인 케이지비(KGB)의 전투요원 700여명은 아프간 정부군 군복으로 위장하고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아프간 사회주의 정권의 수반인 하피줄라 아민 총리를 제거하고 아프간 공산당에 새로운 지도부를 심기 위한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KGB 요원들이 사망하는 대가를 치렀다. 카불의 대통령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아민은 결국 사살됐다.

1978년 4월27일 아프간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는 아프간에게 지금까지 계속되는 전쟁의 서막이 됐다. 쿠데타 직후 정권을 인수한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 당수.
1978년 4월27일 아프간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는 아프간에게 지금까지 계속되는 전쟁의 서막이 됐다. 쿠데타 직후 정권을 인수한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 당수.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은 아프간의 친소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려는 아프간의 부족 세력과 이슬람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임무를 가진 소련군이 아프간 침공에서 맨 처음 한 일은 아프간 친소 정부의 수반 제거였다. 이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근본적으로 내재한 모순을 드러냈다. 이 모순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의 결과가 어떤 주객전도의 결과를 보여줄지를 미리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순에 찬 소련의 아프간 침공의 기원은 1년반 전인 1978년 4월27일 아프간에서 일어난 유혈 쿠데타이다. 아프간 공산당인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의 지도를 받는 아프간 정부군 내 사회주의 성향의 육군 및 공군의 일단의 장교들은 이날 봉기해, 무하마드 다우드 칸 총리를 리셉션에서 암살하고 그의 정부를 전복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장교들은 3일만인 4월30일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아프간인민민주당 수반이 지도하는 혁명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했다. 타라키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하고 곧 혁명칙령 1호에 서명했다. 아프가니스탄민주공화국이 선포됐다.

이슬람권 최초 소비에트 스타일 정부 탄생했으나 곧바로 내부 분열 

이슬람권에서 최초로 소비에트 스타일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부의 탄생이었다. 이슬람권에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 친소련 사회주의 성향의 정부가 수립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은 소련의 영향력이 제한적인 아랍민족주의 성향의 국가였다. 아프가니스탄민주공화국의 선포는 소련에게 이슬람권에서 영향력 확장의 개가였다. 20년동안 공들인 대아프간 공작과 지원의 결실이었다.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의 또 다른 전기로 보였다. 하지만, 이 결실과 성공이 소련에게 최대 재앙으로 변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타라키 정권은 출범과 함께 내분에 휩싸이며, 통치력이 전무함을 보여줬다.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 내에서 타라키가 이끄는 칼크(대중)파와 경쟁자인 바르라크 카르말의 파르참(깃발)파가 정권 출범과 함께 반목과 대립을 보였다. 타라키가 1965년 창당을 주도한 아프간인민민주당은 2년 뒤부터 두 파벌로 나뉘어 반목해왔다. 칼크파는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정부 타도와 소비에트 스타일의 공산정권 수립을 내걸었다. 반면 파르참파는 아프간은 진정한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할 정도로 산업화되지 않았다며,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주장했다.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노선투쟁이었다. 하지만, 아프간 공산당의 두 파벌의 노선과 투쟁은 옳고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양쪽 모두 교과서로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배운 얼치기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반년이 안되어 두 파벌의 대립은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이 와중에서 이들 파벌의 폭력사태보다 더 큰 사태가 시작되고 있었다. 농촌 등 지방에서 공산정권에 대항하는 부족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들의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정의길의 중동대전 70년 http://plug.hani.co.kr/middleast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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