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메카 대사원 점거사태가 발생한지 하루만인 1979년 11월21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사건은 70년대말부터 파키스탄에서 이슬람주의 세력 확장의 극적인 표현이었다. 시위대들의 점거와 방화로 검은 연기가 치솟던 미국 대사관 상공 위로 파키스탄군 헬기가 정찰을 벌이고 있다.
이슬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 최대 성소 메카 대사원이 극렬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에 의해 점령 당한 지 하루가 지난 1979년 11월21일 정오 무렵. 이슬람권의 변방 국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대사관은 나른한 점심 시간에 막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수영장까지 겸비한 32에이커의 미국 대사관 영내를 둘러싼 담에서 갑자기 파키스탄 청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담을 기어올라 대사관 영내로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2주 전 이란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 인질 ‘악몽’
대사관 건물 3층의 중앙정보국 이슬라마바드 지부 사무실에서 부지부장 밥 레서드와 젊은 현장요원 게리 슈뢰엔은 대사관 정문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들을 보면서 직감적으로 이 사태가 2주일 전인 11월5일 이란 테헤란에서 일어난 미국 대사관 점거사태의 재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사관 정문 앞에 버스들이 속속 도착해 수백 명의 폭도들이 버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경이 창문 밖으로 보였다. 이들은 대사관의 경계인 철책을 뛰어 넘었고, 일부는 아예 철책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며 철책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일부 시위대는 리엔필드 소총과 권총을 소지했다. 한 시위자는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 내어, 대사관 정문의 자물쇠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총알은 정문 자물쇠를 맞고 튀어나와 시위대 쪽으로 날아갔다. 이 총알에 놀란 시위대들은 대사관의 지붕에서 경비대인 미 해병이 발포를 한 것으로 착각하고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발포하기 시작했다. 대사관 경비 병력인 10명 남짓한 해병대원으로서는 이들 폭도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에 있던 139명의 대사관 직원들은 곧 대사관 점거라는 비상사태에 따르는 행동지침에 들어갔다. 대사관에 있는 문건 소각과 함께 대사관 내에 철제로 방호된 안전대피처로 피신했다. 대사관은 곧 폭도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됐다. 안전대피처에 모인 대사관 직원들은 자신들이 테헤란 주재 대사관의 직원들처럼 이슬람주의 과격분자들의 인질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느꼈다.
파키스탄 정부 손놓고 지켜보다가 4시간만에 헬기 한 대 띄워
외교 공관, 그것도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사관이 주재국의 폭도화 된 시위대에 의해 점령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주재국의 경찰 등 보안병력들은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폭도들은 대사관 차량들에 가솔린을 붓고, 방화를 시작했다. 약 60여 대의 차량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같은 시각 파키스탄 전역에 있는 미국 외교공관 등 미국 시설들에도 시위대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파키스탄 정부 소유의 펀잡교통회사 버스를 타고, 파키스탄군 참모본부가 있는 라왈핀디와 라호르 등의 미국계 외국인학교와 미국공보처, 이슬라마바드의 미국 기업 등에 모습을 드러내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다.
대사관이 폭도들에 의해 점령 당한 지 4시간만인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대사관 상공에는 파키스탄군 참모본부가 보낸 헬기가 나타나서 상황 파악에 나섰을 뿐이다. 대사관 영내에서 벌어진 방화 사태로 인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헬기의 프로펠러 소용돌이로 더욱 거세게 치솟아 올랐다. 헬기가 기지로 돌아간 뒤 승무원들은 지아 울 하크 당시 파키스탄 총리에게 대사관이 화염에 휩싸여 그 안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한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이미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사망했을 것으로 판단한 파키스탄 정부 지도부는 진압병력을 보내서 흥분한 시위대들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대사관 안 안전대피처로 피신한 직원들은 몰살이냐, 아니면 테헤란 대사관 직원들처럼 인질이 되느냐 하는 선택지만 남은 것으로 생각했다. 안전대피처가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지붕 쪽의 해치에서는 폭도들이 쇠막대기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치를 강제로 열려는 시도였다.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 사태는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 사태보다도 더욱 과격하고, 더욱 엄중한 결과를 자아낼 수 있는 전개 과정을 밟고 있었다.
안전대피처에서 숨죽이고 있던 직원들도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밖의 소음들이 잦아드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 6시30분께 직원들은 해치를 열고 밖을 내다봤다. 폭도들은 사라졌다. 이제 밖으로 나가서 이 사태가 종료됐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숨어서 기다리는 폭도들에게 인질로 잡히든지 결단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온 직원들은 곧 사태가 종료됐음을 알았다. 대사관 영내는 파괴와 방화의 흔적으로 난장판이 됐고, 그때서야 파키스탄군이 출동했다. 2명의 미 해병과 2명의 파키스탄 현지 직원이 이 사태로 숨졌고, 약 2천만 달러를 들여 지은 대사관은 전부 소실됐다.
‘사우디 메카 대사원 미국이 폭격’ 오보가 불쏘시개
이 사태는 하루 전에 있었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대사원 점거 사태가 직접적 발단이었다. 메카 대사원을 점거한 무장세력들과 진압 병력 사이의 총격전이 파키스탄 방송에서는 미국이 사원을 폭격했다는 오보로 전해졌다. 이에 격분한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 과격파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 대사관에 몰려들면서 시작됐다. 사태 자체는 오해로 증폭됐으나, 파키스탄 내에 잠재된 반미 이슬람주의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냈다.
1979년 들어 이슬람 세계를 연이어 강타한 사건들, 즉 이란의 이슬람혁명과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사태, 메카 대사원 점거사태, 그리고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태는 이슬람권 전역에서 들끓고 있던 이슬람주의의 분출지가 어디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앞으로 이슬람주의가 사우디아라비아를 근원지이자 조달본부로 하고, 파키스탄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주전장으로 하는 전개과정을 예고한 것이었다.
곧 발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특히 파키스탄을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의 베이스캠프로 하여 이슬람권 세계의 이슬람주의 전사들을 끌어들인다. 이슬람권 세계의 접경지대라 할 수 있는 파키스탄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베이스캠프가 될 여러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었고,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대사관 방화 사건은 이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이슬람권 분쟁은 사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과정에서 빚어졌다. 영국령 인도에서 소수였던 무슬림들은 다수인 힌두교도 주도의 인도 건국을 피해서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최대 100만 명이 숨진 폭력 사태는 파키스탄에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줬다. 파키스탄의 군부 등 지도세력들은 이슬람권의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세속주의 성향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인도와의 갈등 속에서 강력한 이슬람 정체성을 구하는 모순된 입장을 견지하고도 있었다. 파키스탄의 무슬림 대중들도 인도와의 분리 독립 과정에서 겪은 폭력사태를 이슬람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분위기에 놓이게 된다.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리 진나 이후 파키스탄 지도부는 강력한 세속주의에 사회주의 성향이 채색된 정부를 운영해왔다. 하지만, 파키스탄이라는 신생 독립국가는 인도라는 거대한 인근 국가 옆에서 이슬람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도 자신의 존립 근거를 찾아야만 했다. 인도로부터의 분리독립 과정에서 겪은 분쟁, 독립 이후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의 두 차례의 전쟁, 그리고 1971년 동파키스탄, 현재의 방글라데시 분리독립을 지원한 인도의 전쟁에서 패배한 파키스탄은 이슬람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파키스탄을 포함한 인도 대륙 서북부의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 종파인 데도반디즘의 발원지인 인도 델리 북부의 데오반드에 있는 다르울울름 마드라스.
근본주의 데오반디즘 자선과 교육으로 청년층 파고들어
이 과정에서 고질적이고도 만연한 빈곤, 효율적인 국가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세속주의 지도부의 무능이 겹치면서 파키스탄 무슬림 대중과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이슬람주의가 득세해 나갔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역시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가 퍼질 역사적 배경도 있었다. 파키스탄을 포함한 인도 서북부에는 데오반디즘 Deobandism이라는 근본주의적 이슬람주의의 한 조류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과 북아프리카 일대의 살라피즘과 함께 데오반디즘은 선지마 무함마드 시절의 생활과 신앙을 그대로 재현하고, 쿠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이슬람주의였다.
무슬림의 첫 번째 의무와 충성의 대상은 이슬람이고, 국가는 그 다음이라고 믿었다. 이 종파의 신도들은 모든 나라의 무슬림을 보호하기 위한 성전(지하드)의 신성한 권리와 의무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데오반디즘은 1867년 델리 북쪽의 데오반드 Deoband에 세워진 다르울울룸(Dar ul-Ulum) 마드라스(이슬람 학교)가 발원지이다. 이 데오반드 계열 마드라스는 나중에 파키스탄으로 바뀌는 인도 서북부 지역에서 곳곳에서 유명한 학교로 자리잡았다.
파키스탄 등 인도 서북부에서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가 번성한 것은 이슬람 세계의 접경 지대로서 다른 종교권과 경쟁하며 갈등을 벌이는 지정학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흡수력과 동화력을 가진 인도의 다수 종교인 힌두교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근본주의적 이슬람주의로 경도되는 것이 당연한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1947년 파키스탄의 독립 이후, 다양한 이슬람 종파들이 파키스탄의 완전한 이슬람화를 주장하며 경쟁을 벌였다.
그 중 한 조류가 사이드 압둘 알라 마우두디(Sayyid Abul Ala Maududi)가 1941년에 창당한 자미아트이이슬라미( Jamiat-e-Islami)이다. 마우두디는 알라의 이름으로 주권이 행사되고, 이슬람법인 샤리아도 사회에서 시행되는 “위로부터의 이슬람화”를 주창했다. 정치는 “이슬람 신앙의 통합적이고 분리불가한 부분이며, 무슬림들의 정치행위가 구축하고자 하는 이슬람 국가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언했다. 국가와 그 기제를 통한 이슬람화, 혹은 이슬람화된 국가와 그 기제들을 주장한 것이다.
그에게 이슬람 신앙의 5대 주축인 샤하다(신앙고백), 살라트(기도), 사움(라마단 금식), 하지(메카 순례), 자카트(자선)는 지하드를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그가 창당한 자미아트이이슬라미는 이런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슬람혁명을 위한 전위대였다. 이 정당은 자연스럽게 이슬람법인 샤리아와 통치되는 이슬람국가 건설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서방의 정치경제 제도를 완강히 반대했다. 데오반디즘을 직접적으로 표방하는 정당인 자미아트울레마이이슬람(Jamiat Ulema-e-Islam)도 1945년 창당되어, 주요 정당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데오반디 계열의 마드라스는 이 시기에 남아시아 전역에서 번성했고, 데오반디 종파의 성공한 신도들은 불우한 청년들에 대한 자선과 교육에 적극 나섰다. 데오반디즘은 이렇게 중하류 계층의 청년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성향의 세속주의 지도력의 무능에 절망한 엘리트 청년 계층에게도 파고 들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 정통성 만회 위해 이슬람화
파키스탄의 이슬람정당인 자미아트이이슬라미를 창당하고,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사이드 압둘 알라 마우두디
1977년 7월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주도한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파키스탄에서 이슬람주의 세력 확장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마우디드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한 지아는 군부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파키스탄의 이슬람화로 만회하려 했다. 이슬람 보수주의와 이슬람 국가는 지아의 군사정부 최우선 정책이 됐다. 자미아트이이슬라미는 지아 군사정부의 정치적 동반자가 됐다.
지아는 미 대사관 방화사건이 나기 한 달 전인 1979년 10월21일 파키스탄에서 “진정한 이슬람 질서”를 세우고자 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미 1년 전에 절도범의 신체 절단 및 간통사범에 대한 공개적 태형 등 전통적 이슬람식 징벌을 승인하기도 했으나, 이는 실제로는 거의 시행되지 않는 상징적 조처에 불과했다. 그가 이슬람법인 샤리아의 시행을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주춧돌로 삼으려 했다. 선거 취소 등 자신의 비민주적 조처를 이슬람화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이슬람에서는 서방식의 선거를 위한 규정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미아트이이슬라미는 지아의 이런 입장을 옹호했다. 어쨌든 지아는 79년을 전후해서 파키스탄의 이슬람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기존 법률들이 샤리아와 부합되는지의 검증부터 시작해서, 태형을 포함한 이슬람 형법의 도입, 교육의 이슬람화 등을 추진했다. 무엇보다도 매해 라마단 기간 동안의 자선(자카트)용으로 모든 금융기관 계좌에서 2.5%의 세금을 매겼다. 이슬람권에서 자카트는 종교적 의무이기는 했으나 강제사항은 아니었다. 파키스탄은 세금으로 징수되는 자카트를 최초의 국가가 됐다.
자카트로 징수된 세원은 주로 마드라스의 건립과 운영에 사용됐다. 10년이 넘는 지아의 통치 기간 중에 마드라스는 893개에서 2801개로 3배나 늘었다. 이 마드라스 중 데오반디 계열이 64%나 됐다. 특히 이 마드라스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대에도 많이 신설되어,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 무자헤딘의 양성소로 기능했다. 무엇보다도 나중에 아프간을 접수하는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이 마드라스에서 양성된다.
사우디 오일달러 쏟아져 들어와 물 만난 물고기
파키스탄에서 마드라스 건립과 운영 붐은 70년대 이후 오일달러의 세례를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의 전도로 더욱 증폭된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달러가 넘쳐나게 된 사우디의 모스크와 자선단체들은 쿠란을 인쇄해 이슬람권 전역에 뿌리는 한편 모스크 건립과 이슬람 교육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와하비즘인 사우디 모스크와 자선단체들은 특히 자신들과 비슷한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를 적극 후원했고, 파키스탄의 데오반디즘 마드라스는 가장 대표적인 수혜자였다.
파키스탄의 근본주의 성향 이슬람정당인 자미아트이이슬라미의 대중집회. 2012년 10월7일 카라치에서 열린 이 집회에서 이 정당의 깃발을 든 지지자들이 당시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을 성토하고 있다.
사우디 등 걸프 지역의 보수적 이슬람주의와 비공식적인 연대를 맺어온 자미아트이이슬라미는 이 과정에서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다. 자마아트는 지아 정권의 정치적 동반자였고, 사우디 와하비즘 종파가 뿌리는 오일달러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특히 이슬람권 전역의 대학 캠퍼스에서 자마아트 등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는 70년대말로 접어들면서 그 영향력을 극적으로 신장시켰다. 중동 등 이슬람권에서 그 이전까지 득세했던 아랍민족주의 등 사회주의 성향의 세속주의 정권이 무능을 드러내면서 실패하자, 이슬람권의 대학생들은 자마아트 같은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조직에 포섭되기 시작했다.
자마이트의 학생조직은 70년대말 이슬라마바드의 명문 콰이드이아잠대학교 등 주요 대학교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운동을 밀어내고 학생회를 장악하는 등 대학교 학생운동권 주도권을 쥐게 된다. 1979년 들어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의 성공은 이슬람권 대학생, 특히 이슬람의 주류인 수니파의 근본주의 성향 이슬람주의 대학생들을 격동하게 했다. 수니파 근본주의가 기독교 등 이교도보다도 더 증오하는 시아파들에 의해 자신들이 꿈꾸던 이슬람혁명이 선취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수니파 근본주의 세력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슬람혁명을 더 과격하게 추진하게 했다.
79년 11월5일 이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점거 및 인질사태가 시작된 다음날 콰이드이아잠대학교가 있는 이슬라마바드의 외교단지 지역의 이란대사관은 미국을 비난하고 강대국들에 대한 이슬람혁명을 위한 지하드를 촉구하는 현수막으로 둘러쳐졌다. 이 현수막에 자극된 이 대학교의 자미아트 계열 이슬람주의 학생들은 2주 뒤 미 대사관을 습격해 방화하는 주도 세력이 된다.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기 직전에 이미 파키스탄은 소련을 상대로 한 지하드의 베이스캠프가 될 여건을 완벽히 구비한 상황이었다. 국가 체제를 이슬람주의화 하려는 군사정부, 자미아트 등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의 흥기, 대학생 등 청년 계층에서의 이슬람주의 확산, 사우디 오일달러라는 이슬람주의 확산을 위한 풍부한 자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여건이 조성한 이슬람주의 학교인 마드라스에서의 이슬람 전사 양성이 시작되고 있었다. 파키스탄에서도 이런 이슬람주의 확산 압력은 미 대사관 방화 사건이 난 지 한달만에 터진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거대한 분출구를 찾게 된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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