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전쟁에 참전한 소련의 대게랄라전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 부대원들. 소련은 중반 들어 아프간전에서의 무자헤딘의 게릴라 전술을 분쇄하기 위해 스페츠나츠를 투입해, 전쟁의 반전을 시도한다. 이들은 현지 무자헤딘 모습으로도 위장해, 무자헤딘 전열을 교란분쇄한다.
1985년 3월15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정책, 프로그램 및 전략’이라는 이름의 비밀 ‘국가안보정책지침-166’(NSDD-166)에 서명했다. 아프간 전쟁에 대한 미국의 비밀공작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정책 지침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NSDD-166 서명을 전후한 시기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변곡점이었다. 아프간 무자헤딘 세력에 대한 미국 등 서방의 지원 증가, 무자헤딘 세력의 득세, 그리고 이에 맞서는 소련의 반격이 맞물리면서, 아프간 전쟁은 그 운명을 결정할 시기로 치달았다.
NSDD-166의 기본 내용은 아프간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목적을 변경하는 것이었다. 지미 카터 전임 행정부 시절에 설정된 정책목표인 소련군에 대한 ‘교란’에서 ‘승리’로 격상시키자는 내용을 담았다. 이 문서는 “우리 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철수이고 중기적(1985-1990)으로는 아프간의 독립적 지위의 복원이다”며 “미국은 우리의 궁극적 목적에 우리를 더 가까이 접근시킬 잠정 목표들을 추구할 것이다”고 밝혔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장은 아프간 소련과의 대결을 추구하기 위해 아프간전 개입을 주장한 가장 열렬한 후원자이자 지지자들이었다. 1986년 10월 백악관에서 만나 국제 현안을 논의하는 두 사람.
이슬람세력에 테러전술 전수…뒤에 9·11테러로 부메랑
이 객관적 목표들이란 “아프간을 병합하려는 소련의 장기적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련에게 보이고”, “아프간이 소련의 기지임을 부정하고”, “아프간 문제에 관해 제3세계와 이슬람 세계에서 소련을 고립을 촉진하고”, “소련의 침략에 저항하는 원주민 운동의 패배를 막고”, “제3세계에서 소련 침략을 저지하려는 결단력의 단호함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 목표에 도달기 위해, “우리의 비밀 작전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지원 향상”, “아프간 저항 세력의 군사 효율성 향상” 등을 미국 정부 내의 책임있는 관련 부처들의 기관장들에게 명령했다.
이 정책 결정은 그동안 아프간 전쟁에 대한 개입에서 금기시하던 미국의 직접 개입을 여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이 결정에 명시된 ‘정보 지원 향상’ 차원에서 미국의 첨단 위성 파악 위치 정보 등을 무자헤딘 세력에게 직접 지원하며 그들의 소련군 공격을 도왔다. 또 아프간 무자헤딘 세력에 대한 지원을 양적으로 획기적으로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도 변화시켰다. 무자헤딘 세력들에게 첨단 무기를 공급하는 한편 소련군에 대한 테러 공격을 전술로 구사하게 했다.
이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에게 아프간 전쟁을 테러 공격과 전술 훈련장으로 본격적으로 만드는 계기였다. 아랍 등 외국 출신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은 아프간 전장에서 미국 중앙정보국과 파키스탄정보부로부터 테러 공격과 전술을 훈련받아서, 나중에 전 세계에서 9.11테러 등 미국과 서방을 향한 테러 공격을 구사하게 된다. 워싱턴이 아프간 전쟁에 대한 전략목표를 변경한 배후 동력에는 아프간 전쟁에 대한 윌리엄 케이시 당시 중앙정보국장을 필두로 한 워싱턴의 반공 강경우파 세력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1984년 10월 아프간 접경 지대의 파키스탄 내 무자헤딘 캠프를 비밀 방문한 윌리엄 케이시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왼쪽 선글래스를 낀 사람). 그의 옆에 선글래스를 낀 악타르 압두르 라만 파키스탄정보부장이 동행했다.
미국법 어기고 무자헤딘 캠프 직접 찾아 훈련 등 참관
1984년 10월 어느날 밤. 창문이 없는 등 한눈에 보아도 특별장치를 한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C-141 스타리프터 수송기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남쪽 한 공군기지에 조용히 착륙했다. 트랙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윌리엄 케이시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 그는 악타르 압두르 라만 파키스탄 정보부(ISI) 부장의 영접 속에서 곧 모습을 감췄다. 다음날 새벽 케이시는 이 공항의 활주로에 준비된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들은 편대를 이뤄 남서쪽 아프간 접경 지대로 날아갔다. 아프간 접경 지대에 있는 3곳의 비밀 무자헤딘 훈련기지에 대한 비밀 방문이었다. 아프간 접경 지대에 있는 무자헤딘 캠프에 대한 미국 중앙정보국장의 첫 방문이었다.
첫 캠프에서 케이시는 열흘간의 게릴라 코스 훈련을 받는 수십명의 무자헤딘들을 보았다. 이들은 공격용 소총 전술, 접근과 퇴각, 로켓 추진 수류탄, 박격포 사용법 등을 배우고 있었다. 악타르는 미국 시민들이 내는 세금이 이곳에서 잘 사용되고 있다고 케이시를 안심시켰다. 두 번째 캠프에서 케이시는 소련이 깔아놓은 지뢰밭의 지뢰 이랑을 폭발시킬 수 있는 중국제 지뢰 제거장치 사용 등을 보았다. 하지만, 중국제 지뢰제거장치는 지뢰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고, 무자헤딘들은 이 때문에 사상자를 내고 있다고 파키스탄 정보부 관리들은 케이시에게 설명했다. 이 방문에서 케이시는 무자헤딘들은 중화기를 발사하고, 중앙정보국이 제공한 플라스틱 화약과 기폭장치를 단 폭탄들을 만들고 있는 것을 지켜봤다.
라왈핀디의 파키스탄정보부 본부에 돌아온 뒤 케이시는 파키스탄 쪽을 감짝 놀라게 하는 제안을 했다. 아프간에서의 지하드를 소련 영내로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아프간을 통해서 소련 남부의 중앙아시아 자치공화국 내의 무슬림 지역으로 전복 및 선전 활동을 수출하자는 제안이었다. 1980년 1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승인하고,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승계한 ‘아프가니스탄의 독립 회복’이라는 아프간 전쟁에 대한 미국 지원을 미국 대통령령은 간접지원으로만 규정하고 있었다. 케이시의 무자헤딘 캠프 방문 자체도 미국법으로는 불법이었다. 그런데, 케이시는 이 전쟁을 소련 영내로까지 확대하자는 대담한 제안을 한 것이다.
소련군의 공격용 헬기 Mi-24D가 아프간 전쟁 당시 카불 외곽 산악지대를 비행 정찰하고 있다. Mi-24D는 소련군 특수부대 스페츠나츠와 함께 아프간전에 투입되어 무자헤딘의 게릴랄 공격을 무력화하며 한때 전쟁의 추를 기울게 했다.
‘수색과 분쇄’ 반게릴라 전술로 대반격 나서 균형추 흔들
케이시의 이런 제안은 6년째로 접어든 아프간 전쟁이 소련의 반격으로 기로에 선데다, 그동안 아프간 전쟁의 효용성을 본 레이건 정권 내의 보수반공 세력들의 아프간 전쟁 확대 압력과 맞물려 나왔다. 무자헤딘 세력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하던 소련은 1984년초부터 이에 맞서는 새롭고 공격적인 전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스페츠나츠라고 불리는 소련의 정예 특수전 부대와 신형 공격용 헬기 Mi-24D를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대에 투입해, 무자헤딘 세력들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공격적 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막강한 화력과 정찰 능력을 가진 Mi-24D 헬기를 파키스탄 접경 지대까지 투입해서, 보급을 받고 귀환하는 무자헤딘들을 포착해 공격했다. Mi-24D에 의해 포착되어 공격에 쫒기는 무자헤딘들을 지상에서는 대게릴라전 전투능력이 뛰어난 특수군 스페츠나츠가 공격했다. 스페츠나츠는 Mi-24D의 공격에 쫓기는 무자헤딘들을 습격했고, 무자헤딘으로도 위장해 그들을 분열시키고 교란했다. 무엇보다도 무자헤딘 세력들의 생명선이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보급선 운영에 차질이 왔다. 이는 ‘수색과 분쇄’라는 전형적인 반게릴라 전술이었으며, 막강한 신형 헬기와 특수군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위력을 보였다.
소련군 사령관들은 이 전술이 성공하자, 점점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국 쪽은 이 전쟁의 균형추가 바뀔 수 있다는 우려에까지 도달했다. 1984~1985년 레이건 행정부의 정보 기관들은 소련의 크렘린 지도부가 소련의 붉은군이 아프간 수렁에 빠질 위험이 있고, 전쟁에 승리할 특단의 대책을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졌고, 이런 전술을 채용했다는 민감한 정보들을 입수했다. 소련의 강경파들은 아프간 전쟁을 2년 안에 끝낸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 새로운 전쟁 플랜은 1985년 봄 동독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서 아프간으로 전보된 엘리트 지휘관 미하일 자이체프 장군의 주도로 입안되어 추진됐다.
미국 무자헤딘에게 위성정보 제공하고 전문적 게릴라 훈련
소련은 고도로 훈련받고 사기가 높은 공수특전 병력인 스페츠나츠 병력의 약 3분의 1인 2천여명이나 투입했다고 당시 파키스탄정보부에서 아프간 공작을 맡은 모하마드 유사프 장군이 자신의 아프간 전쟁 회고록 <곰 사냥덧>에서 밝혔다. 소련은 또 이 스페츠나츠 특수군과 정규군을 돕기 위해 아프간 내에서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존재도 강화했다. 스페츠나츠의 교란 공작을 지원함은 물론이고, 첨단 통신장비를 통한 파키스탄과 무자헤딘 사이의 전투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이를 위해 1984년께에 이미 무자헤딘 세력들의 전투지역 통신을 가로채는 이동통합통신센터인 이른바 ‘옴스크 밴’이라는 자신들의 가장 정교한 전장통신장치를 배치했다. 이 장치는 가로챈 통신 정보를 이용해 즉각 무자헤딘과 그 시설에 대한 조율된 공중공격을 가능케 했다.
소련군의 반게릴라 전술에 봉착한 무자헤딘들의 사기는 1984년을 지나면서 잠식되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펜타곤에서는 이런 정보들을 분석하면서 아프간에서 소련군의 부상을 분쇄할 숙고에 들어갔다. 그들이 찾은 대답은 우선 소련군의 반게릴라 전술에 맞설수 있는 정보력을 무자헤딘에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위성을 사용해 파악한 식별정보를 무자헤딘들에게 제공해, Mi-24D 등 소련군의 이동화기를 파괴하는 한편 무자헤딘들에게는 보다 안전한 은밀한 침투 경로를 확보하게 해서, 옴스크 밴 등 소련군 목표물을 확보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자헤딘 세력들에게 전문적인 게릴라 훈련도 필요했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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