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이슬람 세계의 최대 성소인 메카대사원에 대한 무력점거 사태는 사우디 내에서 들끓는 이슬람주의 세력의 불만을 드러냈다. 사진은 사우디 정부군과 점거세력의 교전으로 메카대사원 위로 포연이 피어오르는 장면.
이쿠완의 반란이 진압된 사빌라 전투가 끝난지 70년이 흐른 1979년 11월20일. 이슬람 세계를 경악케 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슬람의 최고 성소인 메카 대사원이 일군의 무장세력에 의해 점령당했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직접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라고 선언한 메카의 카바 대사원은 이슬람 정통성의 상징이었다.
신성한 성소가 무기로 더럽혀졌고, 순례자와 사제들이 인질로 잡혔다. 사원을 점령한 500여명의 무장세력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완전한 신성국가를 요구했다. 이들의 비타협적인 요구는 점거가 시작되자마자 사우디 내무부의 보안 병력들로 하여금 유혈 진압을 하게 했다. 무장세력들의 극렬한 저항에 따라 전투가 발생하고, 진압에 나선 병력들이 오히려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점거한 무장세력들은 대사원의 확성기를 통해 미국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 및 아라비아 반도 내의 모든 비무슬림 외국 민간인과 군인들의 추방을 계속 요구했다.
결국 사우디 정보기관인 총정보국의 지휘 아래 사우디의 정예군 국가경비대와 육군이 나서야 했다. 사원 주위에 땅굴을 파고 잠입해 진압하려는 시도들이 실패하자, 사우디 정부는 결국 프랑스 특수부대의 도움까지 받으며 전면 진압에 나섰다. 진압 병력의 극심한 피해 속에서 7일만에 사원은 대부분 탈환됐으나, 몇몇 무장대원들은 사원의 지하묘지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도주한 대원들은 메카 시내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여, 결국 사태는 2주 이상이나 계속됐다. 현장에서 244명이 죽고, 500여명이 부상했다. 체포된 무장세력 중 68명은 나중에 참수형을 당했다.
메카대사원을 점령했다가 사우디 군에 의해 진압당해 체포당한 무장세력들.
근본주의 종교세력 메카 대사원 점령… 이슬람판 재림 예수 깃발
카바 대사원의 존재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지녔다. 대사원 점거 사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하는 알사우드 왕가의 위상을 위협했다. 더 심각했던 것은 대사원을 점령한 무리들이 70년 전 알사우드 왕가를 최대 위기로 빠뜨린 이쿠완의 후예라는 사실이었다. 대사원을 점령한 약 500명의 무장세력들의 지도자인 주하이만 알옥타이비의 가문은 이쿠완의 주요 세력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술탄 빈 바자드 알옥타이비는 이쿠완의 지도자로서 사빌라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아버지 역시 사빌라 전투에 참여한 열렬한 이쿠완이었다. 주하이만의 집안은 사우디 왕가의 고향인 네지드 지역의 가장 유력한 가문 중의 하나로, 그 가문이 속한 유타이바 부족은 이쿠완의 주요 세력으로 사빌라 전투에 참여했다.
메카대사원 점거를 주도한 주하이만 알옥타이비. 사우디 왕가과 같은 고향인 네지드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70년 전 사우디 왕권에 도전한 이쿠완 지도자의 후예이다.
그는 이런 극단적 와하비즘을 이슬람판 재림 예수이자 미륵 사상인 마흐디 사상으로 채색해 추종자들을 확보했다. 자신의 처남인 모하메드 압둘라 알카타니가 심판의 날에 오는 이슬람의 구세주 마흐디라고 선언했다. 임박한 심판의 날에 대비해 완전한 신정국가를 세우자는 이들이 주장은 메디나의 이슬람대학교 신학생 등을 중심으로 추종자들을 끌어모았다. 이집트, 예멘, 쿠웨이트 등 외국에서 온 무슬림들도 가담해서, 사우디 전역의 사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했다.
사우디 왕가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이들의 언행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 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사우디 곳곳에 스며든 와하비즘의 전통, 그리고 와하브의 후예들이 장악한 이슬람 사원과 종교 권력은 이들을 와하비의 충실한 추종자 정도로 대접해줬다. 사우디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 달러도 이들을 도왔다. 오일 달러의 세례를 받은 사우디의 시민들 중 일부는 무슬림의 의무 중의 하나인 자선 행위를 이들에게 했다. 사우디의 넘쳐나는 오일달러에 기반한 사우디 시민과 단체들의 자선은 나중에 아프간 전쟁과 이 전쟁에 참여한 무자헤딘의 주요 재정원이기도 했다.
주하이만의 과거 동료들이 있는 국가경비대 내에서도 동조자가 생겼다. 국가경비대 내의 동조자들은 무기와 탄약, 가스마스크 등을 직접 대사원 경내에 은밀히 반입해줬다. 국가경비대 내에는 사빌라 전투로 분쇄된 이쿠완의 잔존 세력이 흡수됐는데, 그 맥락이 유지되면서 주하이만 세력에 대한 동조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이슬람력으로 1400년의 새해 첫날이자 이슬람의 구세주 마흐디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예언된 날인 1979년 11월20일 이들은 결행에 나선 것이었다.
오일달러 쏟아져 들어오면서 갈등 폭발…국왕 사촌까지 연루
주하이만과 그 추종자들의 메카 대사원 점거사태는 사우디 왕국의 건국, 아니 사우디 왕가가 아라비아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시작한 250여년 전부터 잠재해있던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속권력과 종교권력, 사우디 왕가와 와하비즘 종교 성직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다시 폭발시킨 것이다. 70년 전 전쟁까지 벌인 알사우드 왕가의 세속권력과 와하비즘 이쿠완 세력의 갈등은 사우디 건국 이후 수면 밑으로 들어갔으나, 사우디의 현대화가 추진되면서 다시 부글되기 시작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사우디에 오일달러가 쏟아져 들어오자, 사우디 내의 근본주의 성향의 와하비즘 열혈 무슬림들은 그 불만을 간헐적인 폭력사태로 분출시키곤 했다.
1965년 사우디에 텔레비전이 처음 도입되자, 와하비 과격분자들은 국영텔레비전 스튜디오에 쳐들어가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진압 과정에서 총격을 맞고 사망한 시위대 중의 한명이 압둘 아지즈 국왕을 이은 파이잘 국왕의 사촌이었다. 파이잘 국왕은 이 사건의 여파로 10년 뒤 저격당했다. 이 사촌의 형제 중 한명이 10년이 지난 1975년 3월25일 파이잘 국왕이 주최한 만찬에서 국왕을 쏴 죽였다.
60년대 이후, 특히 사우디가 주도한 1973년 석유금수 조처로 인한 오일쇼크 사태 이후 사우디에는 천문학적인 오일 달러가 쏟아져 들어와 주체를 못할 지경이었다. 이 돈들이 3천여 명으로까지 늘어나는 이른바 ‘사우디 왕자’ 등 알사우드 왕가의 주머니로 들어가 흥청망청 소비되기는 했으나, 왕족들이 모두 소비할 수도 없었고 소비해서도 안됐다.
상당 부분이 사우디의 현대화를 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쏟아져 들어갔고, 사우디의 또 다른 권력이 모여있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 뿌려졌다. 1969년부터 74년까지 사우디 정부 예산은 92억달러였는데, 그 향후 5년에는 1420억달러로 무려 15배 가까이 증가했다. 사우디는 사막 유목 부족사회에서, 고속도로가 사막을 횡단하고 도시에는 사치스러운 쇼핑몰들이 들어서는 불균형한 현대화 국가로 치달았다. 인구의 대부분은 여전히 빈부의 개념조차 희박한 사막의 유목 부족 생활을 하는 반면 도시에는 사치로 흥청거리는 왕족과 도시 상류계급이 생겨났다.
이란의 이슬람혁명도 자극…소련 침공, 이슬람세계 공분 불쏘시개
메카 대사원 사태는 사우디의 현대화로 들끓고 있는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 세력을 이제 방치할 수 없다는 인식을 사우디 정부와 왕가에게 안겨줬다. 이 사건에 앞서 걸프 지역에서 사우디와 패권을 겨루던 이란에서는 이미 이슬람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제 이란은 무슬림들이 동경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절의 이슬람 공동체 움마처럼,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이 구분되지 않는, 정치인과 성직자가 일치화된 이슬람공화국이 됐다. 어쩌면 무함마드와 그 사후 4대까지의 초기 칼리프 시절 이후 처음으로 신정이 일치된 이슬람 공동체의 복원이 시도됐다.
이란의 왕인 샤를 집어삼킨 이슬람혁명 불길의 다음 대상이 사우디의 알사우드 왕가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사우디 왕가 자신들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보당국도 공유했다.
사우디 왕가가 더 우려하는 것은 이런 이슬람혁명이 시아파에 의해 달성됐다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다수이자 주류인 수니파에 맞서 정통성 투쟁을 벌이는 소수 시아파에 의해 이슬람혁명이 달성됐다는 사실은 수니파 이슬람주의 세력을 자극해 경쟁적인 상황으로 추동할 우려가 컸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기독교도 등 이교도나 무신론자보다도 서로에 대한 증오와 갈등을 더 축적해왔다. 이슬람 주류인 수니파의 정통 적자 권력이라고 자처하는 사우디 왕가로서는 이란 시아파의 이슬람혁명을 본뜬 수니파의 이슬람혁명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시아파의 이슬람혁명에 비견될 수 있는 이슬람 부흥운동이 절실했다.
메카 대사원 사태의 여파가 여전히 사우디와 이슬람 세계를 강타하던 그해 12월25일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사우디 왕가에게 시의적절한 탈출구를 제공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들의 분노와 격동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내부의 불만 에너지를 외부로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무슬림들이 증오하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무슬림 형제국가를 침략한데다, 사우디에게는 실질적인 안보 위협도 제기됐다. 러시아 시대 이래 소련이 꿈꾸는 걸프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아프간은 징기스칸과 티무르,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 등 중앙아시아 유목 세력들이 걸프와 아랍 지역으로 진출하는 통로였다. 냉전 시대 내내 사우디 주변의 중동 지역에서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등 친소련 성향의 세속주의 세력이 적지않았다. 소련이 아프간을 평정한 뒤 걸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면, 이들 친소련 세속주의 세력의 영향력도 커져 사우디를 앞뒤로 협공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사우디는 공산주의 무신론 세력인 소련과는 외교관계도 수립하지 않는 적대 관계를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 CIA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로 입금 돼 반군 무기 구입 자금으로
아프간 전쟁과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주도한 사우디 총정보국의 수장 투르키 왕자. 그는 아프간전쟁 내내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가장 관대한 후원자였다.
1980년 새해 들어 사우디는 아프간 전쟁의 무슬림들의 지하드로 만드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사우디의 왕자 중 가장 현대화되고 서방 교육을 받은 투르키는 소련의 아프간 점령은 그 자체로서 목적일 뿐만 아니라 위성 공산당과 좌파운동을 통해서 걸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조처라고 봤다.
그는 지정학적으로 봐서, 파키스탄이 소련의 이런 야망을 저지할 수 있는 최선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파키스탄 군과 정보부를 통한 아프간 반군에 대한 지원이 파키스탄 자체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나라는 이미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부터 이슬람권을 방위하는 암묵적인 동맹국이었다. 파키스탄 군은 사우디 왕국의 안보를 위해 고용되어 있었다.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에는 사우디 공군이 파키스탄의 대도시 카라치에 대한 영공을 은밀하게 커버해주기도 했다.
1982년 왕위에 오르는 사우디의 최대 실력자인 파드 당시 왕자도 1979년 메카 대사원 점거사태를 접하면서 파키스탄을 사우디의 가장 신뢰할만한 동맹으로 보고서, 투르키 왕자의 총정보부의 개입을 적극 지지했다. 이들의 첫 아프간 전쟁에 대한 개입은 현금 살포였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직후, 투르키는 자신의 비서실장 아메드 바디브를 파키스탄으로 파견했다. 바디브의 가방에는 180만달러의 현금이 채워져 있었다. 바디브를 영접한 파키스탄정보부(ISI)의 수장인 악타르 압두르 라만 장군은 일련번호가 나란히 적혀있는 신권으로 채워진 그 현찰을 받아들고는 “세어 볼 필요도 없다”며 흡족해 했다.
그 180만달러는 아프간 전쟁뿐만 아니라 그 이후 사우디와 파키스탄의 동맹, 그리고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사우디의 관대한 후원의 시작이었다. 아프간 전쟁 내내 사우디의 총정보국은 일종의 은행이자, 현금 창구였다. 투르키는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우리들은 공작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작을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수표를 쓰는 일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0년 7월 투르키는 미국 중앙정보국과 아프간 반군에 대한 미 의회의 지원 금액에 사우디도 같은 금액을 제공하는 매칭펀드 조약을 공식적으로 맺었다. 반다르 빈술탄 당시 미국 주재 사우디 대사는 사우디의 자금을 중앙정보국이 운영하는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입금시켰다. 중앙정보국은 이 스위스 은행 구좌를 이용해 국제무기시장에서 무기를 구입해 아프간 반군에 제공했다.
그후부터 투르키는 한달에 많으면 5차례나 파키스탄을 방문할 정도로 아프간 전쟁 개입을 위한 파키스탄 지원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그후 20년 동안 아프간과 아프간 무자헤딘의 운명을 결정짓는 설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아프간 무자헤딘 세력 중 누구를 지원할지를 결정했고, 파키스탄정보부에 대한 지원으로 이 기구가 파키스탄의 실질적인 권력기관이 되도록 했다.
1980년 사우디 휴양도시 타이프에서 열린 이슬람권 국가들의 모임인 이슬람회의기구(OIC)에서 투르키의 총정보부는 아프간 무자헤딘 사령관들을 초청해, 압둘 라술 사이야프를 사우디의 대리인을 세웠다. 페샤와르로 돌아온 사이야프는 사우디가 지원하는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프간 반군을 조직하는 한편 사우디의 와하비즘 교리를 무자헤딘 세력들에게 전파하는 통로가 됐다. 사이야프는 또 투르키의 총정보국에게 파키스탄정보부와는 독립된 아프간 반군에 대한 영향력 통로가 됐다.
이슬람 사원과 자선단체들도 경쟁적으로 무자헤딘 지원
사우디 정부와 총정보국과는 별도로 사우디 내의 부유한 와하비 성직자 세력들도 경쟁적으로 아프간 지원에 나섰다. 사우디 왕국의 최고 성직자이자 와하브 가문의 후손인 셰이크 압둘 빈바즈도 자신의 무자헤딘 대리인을 세워, 모금한 자선기금들을 사우디 내의 무자헤딘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뿌렸다. 특히 무슬림들의 의무인 자선을 통한 기부는 아랍 출신 무자헤딘들을 양성하는 기반이 됐다.
오일달러의 세례를 받은 사우디의 독실한 중산층 무슬림들의 자선은 마치 서방 국가들의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자선 기부와 같았다. 기독교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무슬림들의 자카트가 각 모스크마다 쌓였다. 여성 무슬림들도 금목걸이를 벗어서 기부함에 넣었다. 리야드의 지사인 살만 왕자는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한 자선기부 방송을 연례화하여 풍부한 자금을 모았다. 사우디의 왕자들도 자신이 관할하는 정부 예산을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이렇게 모인 자선기부금들은 총정보국이 거둬서 스위스 은행 구좌로 입금했으나, 무슬림의 영향력 있는 자선단체들이나 모스크들은 별도의 통로로 아프간 무자헤딘 세력들에게 직접 건넸다. 아프간으로 가는 무자헤딘들도 후원자를 찾아서 자금을 개별적, 혹은 집단적으로 건네받았다. 오사마 빈라덴의 경호원을 지낸 측근인 아부 잔달은 자신의 첫 지하드인 아프간 무자헤딘 활동 비용을 교사였던 여성으로부터 한달치 월급인 2천달러를 받으며 시작했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 들끓던 이슬람주의 압력은 갑자기 아프간이라는 통로로 바람이 빠지듯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렇게 아프간 전쟁의 자양분이 됐다.
정의길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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