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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소련, 아프간 공산정권-이슬람 딜레마에 자충수

등록 2013-10-04 12:25수정 2013-10-04 14:19

중동대전<3>
교조적 유혈 개혁에 지역부족 이슬람 반란 눈덩이
침략자 딱지-미국 개입 무릅쓰고 크리스마스 침공
1979년 3월 아프간 헤라트에 일어난 봉기는 아프간의 친소정부 몰락과 소련군 침공을 부른 계기였다. 헤라트 시내에 세워진 헤라트 봉기 기념물.
1979년 3월 아프간 헤라트에 일어난 봉기는 아프간의 친소정부 몰락과 소련군 침공을 부른 계기였다. 헤라트 시내에 세워진 헤라트 봉기 기념물.

공산당 내의 파벌투쟁이 아니어도, 쿠데타로 집권했을 때 아프간의 상황은 교조적인 아프간 사회주의 세력의 역량으로는 이미 감당하기 힘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이 타도한 다우드 정권의 6년 집권 동안 아프간은 중앙과 지방 권력의 조화가 깨지고, 원심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국왕의 중앙권력과 부족의 지방권력 조화로 점진적 현대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영국과 3차례의 전쟁 끝에 독립을 인정받은 아프간은 그 후 다수 종족인 파슈툰족의 무사히니 왕조의 통치 하에서 50여년간(1929~1978년) 비교적 안정을 누려왔다. 사회와 경제가 여전히 봉건적유제가 만연한 후진적 상태에 머물렀으나, 그 상태에서의 조화를 깨지않고 안정을 꾸려왔다. 1933년 등극한 2대 국왕 무하마드 자히르 샤는 봉건적 상태의 아프간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 점진적인 현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 양쪽에 대한 균형외교를 펼쳤다. 소련으로부터 힌두쿠시 산맥을 관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의 살랑 터널 건설을 따내고,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는 각종 원조를 얻어냈다. 60~70년대 여름마다 수도 카불은 서방 여행객들이 몰려들었다. 젊은 배낭족들에게 카불은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였다.

당시 아프간 중앙정부는 약했으나 안정적이었다. 아프간의 전통적인 지방 및 부족 권력과의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카불 등 도시 지역에서 중앙 정부는 치안과 공공서비스를 책임졌다. 농촌 등 지방에서는 부족, 종족, 씨족 등 지역 실체들이 질서를 담당했다. 지역에서 큰 분규가 일어나면, 중앙 정부의 치안력이 개입하기도 했다. 중앙과 지방 사이의 권력 공유가 아프간에서는 평화와 안정의 틀이었다.

국왕은 입헌군주제 도입으로 아프간의 점진적 현대화를 꾀했다. 1964년 ‘로야 지르가’(대의회)를 소집해, 양원제 의회와 사법부 독립을 명시한 헌법을 기초했다. 3권 분립을 통한 권력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도 도입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는 자히르 샤의 ‘민주주의 청사진’을 평가하고, 그가 아프간에서 안정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왕 외유 중 국왕 사촌이자 처남이 쿠데타, 비극의 씨앗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프간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70년대의 세계적인 불황은 아프간을 피해가지 않았다. 봉건적 유제가 붕괴되면서 찾아온 경제 악화는 아프간에 정치적 불안정성을 조성했다. 중앙 정부 내의 부패와 부족 사회의 소요가 잦아졌다. 국왕에 대한 국민적 인기는 시들해졌다. 1972년부터 미국 관리들은 아프간에서의 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듣기 시작했다. 그 해 4월 미 국무부는 몇 주 내로 다우드 칸 전 총리가 주도하는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구체적 언질을 받았다. 1972~73년 내내 미국과 소련은 이런 쿠데타 가능성 정보를 받았다.

1973년 6월26일 국왕 자히르 샤는 신병을 치료하려고 런던으로 출국했다. 그는 치료 뒤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가졌다. 그의 휴가는 2002년 4월이 되어서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는 긴 휴가가 됐다. 국왕이 외유 중인 7월16일 다우드는 군부의 지지를 얻고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히르 샤 국왕의 사촌이자 처남인 다우드 칸은 1950년대 총리로 재직할 때 사실상 섭정으로서 정부를 운영했다. 그는 아프간 여성 권리의 확대 등 진보적인 현대화주의자이면서도, 아프간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 중심주의자였다. 그는 아프간과 파키스칸의 파슈툰족 지역에 대 파슈툰 국가인 ‘파슈투니스탄’ 건설을 포함한 대(大)파슈툰주의 주창자였다. 한마디로 파슌툰족 중심의 중앙정부 권력 강화가 그의 정치적 노선이었다.

다우드의 쿠데타는 그 후부터 시작될 아프간 비극과 불안정의 전환점이었다. 지방과 공존하던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던 파슌툰 지도부의 50년 통치 뒤, 갑가지 국가 권력구조가 흔들렸다. 다우드가 강력한 중앙 통제를 기도하자, 70년대 이후 경제불황으로 소요 양상을 보이던 지방의 부족 사회는 반발했다.

중앙에서는 1950년대 이후 소련의 지원으로 양성되던 급진적인 사회주의 세력들이 먼저 봉기했다. 1978년 4월, 유명한 공산주의 활동가인 미르 악바르 카이베르가 암살되자, 이에 항의하는 사회주의 세력들의 대대적 시위가 카불에서 벌어졌다. 약 1만5천여명의 시위대들이 그의 장례식에 가담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다우드 정부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검거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는 며칠만에 친소 사회주의 세력이 사주한 군부쿠데타를 불렀다.

소련이 양성한 교조적 사회주의자들 급속 팽창, 군부 쿠데타

공산주의 세력의 군부 쿠데타에 앞서 20여년 동안 소련은 아프간에서 공산세력 양성을 지원했다. 정보기관 케이지비(KGB)는 자금을 대면서 카불대학교와 아프간 정부군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지도부 네트워크를 양성했다. 소련 내에서 약 3725명의 아프간 장교들이 훈련받고 공산주의 이론을 주입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이렇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아프간 정부의 미소 줄타기 외교 하에서 이뤄진 소련의 대외원조 때문이다.

왼쪽부터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 하피줄라 아민, 바라크 카르말. 1978년 친소 쿠데타 뒤 아프간 친소정부를 이끈 사회주의자들은 교조적 정책 추진으로 부족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반란을 부른다. 아프간에 재앙을 부른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왼쪽부터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 하피줄라 아민, 바라크 카르말. 1978년 친소 쿠데타 뒤 아프간 친소정부를 이끈 사회주의자들은 교조적 정책 추진으로 부족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의 반란을 부른다. 아프간에 재앙을 부른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특히 다우드는 50년대 총리 재직 때와 70년대 쿠데타 집권 뒤에 기본적으로는 미소 균형외교를 하면서도 소련에 약간 더 기울어져, 소련의 원조를 얻어냈다. 소련 역시 아프간과 접경을 하는 지정학적 상황에다가, 러시아 이래 아프간에 대한 전통적인 지정학적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양쪽의 이런 이해는 맞아떨어져, 아프간 내에서 소련이 후원 하에 양성된 공산주의 세력의 급속한 팽창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과 청년 장교 중심의 교조적 공산주의 세력에 불과했다.

1978년 4월 군부 쿠데타 뒤 집권한 공산주의 세력은 안으로는 내분에 휩싸이자, 밖으로 교조적인 공산주의 개혁을 더욱 밀어붙였다. 다우드 칸 정부 시절부터 이미 원심력을 보이기 시작한 지방의 부족 권력은 본격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카불의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에서 파견된 정치군사 고문단은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에 나온대로 개혁을 압박했다. 여성에 대한 문맹 타파 운동을 시작으로, 징병제를 실시했다. 특히 부족 원로와 이슬람 학자들이 통제하던 토지를 몰수했다. 지역에 있는 기존 권력 실체들의 본격적 반발을 불렀다. 이슬람식 대부제도를 폐지하고, 신부 지참금을 금지하고, 혼인의 자유를 선포했다. 대학교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의무화했다.

이 중 많은 개혁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고 진보적이었으나, 아프간은 이런 개혁을 받아주고 지탱할 세력이 없었다. 특히 이슬람과 봉건 유제가 강력한 농촌 등 지역에서는 더욱 그랬다. 카불 등 대도시와 마을에 파견된 소련의 고문단들도 군, 민병대, 공장, 학교 등에 자리 잡고 공산 개혁을 채근했다. 공산 개혁에 조급했던 타라키 정부는 반대 세력들을 제어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펼쳤다. 1979년에 접어들면서, 카불의 공산주의 정부는 종교 지도자 등 약 1만2천명의 정치범을 수감했다. 조직적인 처형이 수용소의 벽 뒤에 시작됐다.

타라키 정부의 공포정치와 함께 지역에서의 반란도 시작됐다. 1978년 10월, 동부 산악지대의 파슈툰 부족세력들이 총을 잡고 정부에 대항하는 전투에 궐기했다. 군나르 주, 힌두쿠시 산맥, 바다크샨 주 등 동부의 몇몇 지역은 반정부 거점으로 변했다. 타라키 정부는 더 광범위하고 탄압과 체포, 처형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지역에서의 반란은 정권의 구심인 군부 내로 번졌다. 정부군 내에서 수천명의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세력 득세, 미국 대사 납치 살해하고 소련 고문단과 가족 죽여

1979년 들어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그해 1월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했다. 이란과 접경한 서쪽 국경 지대에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2월 수도 카불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대사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결국 피살됐다. 경찰로 위장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돌프 덥스 당시 미국 대사를 납치해서, 카불 호텔에서 인질로 잡았다. 그들은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타라키 정부는 대치한지 2시간 만에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와중에서 덥스 대사가 살해됐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덥스의 죽음은 “소련의 무능과 공모가 관여된 비극적 사건”이라고 개탄했다.

소련이 덥스 대사의 죽음을 각오하고도 타라키 정부의 성급한 진압을 지시 혹은 의도적으로 방조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소련의 입장에서는 미국 대사의 죽음이라는 통제불능의 상황을 제어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소련이 이 문제를 제어하지 못한 무능을 보였다는 것이다.

아프간은 이슬람의 다수 종파인 수니파가 다수이다. 소수파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 접경한 헤라트 등 서쪽 지역에서는 이란의 영향으로 시아파가 거주하고 있다. 과거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 중 하나인 헤라트는 이란 등 페르시아 지역과의 교역 요충지로서, 이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1978년부터 불붙기 시작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 기운은 헤라트 지역의 시아파뿐만 아니라 비시아파 등 이슬람주의 세력 전체에게 그 파장을 확장했다.

3월 들어 헤라트에서 격렬한 반정부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 진압을 명령받은 아프간 정부군 육군 17사단 내에서 오히려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를 주도한 이스마일 칸 대위는 공산주의 점령자들에게 성전을 선포하면서, 17사단 소속 병사 대부분을 봉기에 참가시켰다. 17사단은 집단 봉기해, 그 병영은 반란의 거점이 됐다. 봉기한 병사들은 소련 고문단과 그 가족까지 참혹하게 죽여, 그 시체를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했다.

타라키 정부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조종사들이 모는 전투기를 출동시켰다. 타라키 정부는 이 도시에 무자비한 공습을 퍼부어, 반란을 분쇄시켰다. 반란을 진압시키는 공습이 끝날 때 쯤, 카불의 공산정부는 집권 1주년의 전야를 맞았다. 카불의 공산 정부는 헤라트에서만 2만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봉기 주도자 이스마일 칸은 도피했고, 그는 서부 지역에서 반란을 확산시켰다.

스스로 흘린 허위정보에 현혹돼 자기도 속이면서 파병

이 반란을 접하면서, 소련은 아프간에서의 상황이 심각하게 잘못되어가고 있고, 아프간에서의 공산혁명을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당시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 보내진 최고기밀 정보 평가는 반란 지도자들이 이데올로기에 동력을 둔 “종교적 광신자”들이며, 병사들이 정부에 대해 “이슬람의 깃발 아래”에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지역의 부족 세력뿐만 아니라 군 내에서도 반란이 확산되자, 타라키 정부는 소련에 비상 군사지원을 요구했고, 소련군의 직접적 개입까지 구걸하게 된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군을 파견해달라는 아프간 공산정부의 요구를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아프간 상황을 더 악화시킬뿐이고, 미국의 개입 등 국제적 파장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으로서는 아프간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을 손을 놓고 볼 수 없는 딜렘마에 빠졌다. 당시 케이지비의 간부들은 “우리가 침략자라는 딱지를 붙일 것이라고 명심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아프간을 잃을 수는 없다”고 속을 끓여야 했다.

아프간에 대한 이런 딜렘마에 발목을 잡힌 소련은 스스로의 자충수에 빠진다. 소련은 자신들이 흘린 허위정보에 스스로 현혹되면서 파병으로 몰린다. 소련은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운명의 크리스마스 침공으로 나아간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정의길기자의 중동대전 70년 http://plug.hani.co.kr/middleast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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