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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소련, 체제붕괴 대가…미국도 새 적 키워

등록 2013-10-31 10:23수정 2013-10-31 10:25

중동대전 <5>
소, 스스로 흘린 허위 정보에 속아 최악까지
미, 반군 지원 위해 파키스탄에 핵무장 용인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중앙정보국을 통한 반군 지원 공작을 주도한 이는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였다. 브레진스키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마자,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 지대를 방문하는 등 미국의 아프간 공작의 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역할과 행적으로 당시 그는 나중에 9.11테러를 주모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직접 만나 지원했다는 의혹도 샀다. 이 사진은 그런 의혹은 주장하는 증거로 유포됐다. 왼쪽은 파키스탄과 아프간 접경지대를 방문한 브레진스키이고, 함께 있는 이는 빈라덴이라고 주장됐으나, 아프간 반군인 무자헤딘의 한명으로 추정된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중앙정보국을 통한 반군 지원 공작을 주도한 이는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였다. 브레진스키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마자,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 지대를 방문하는 등 미국의 아프간 공작의 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역할과 행적으로 당시 그는 나중에 9.11테러를 주모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직접 만나 지원했다는 의혹도 샀다. 이 사진은 그런 의혹은 주장하는 증거로 유포됐다. 왼쪽은 파키스탄과 아프간 접경지대를 방문한 브레진스키이고, 함께 있는 이는 빈라덴이라고 주장됐으나, 아프간 반군인 무자헤딘의 한명으로 추정된다.

소련 지도부가 상식에 기초한 개혁과 국정운영을 조언했지만, 카불의 사회주의자들은 권력투쟁으로 힘을 소진하고 있었다. 소련은 카불의 대사관을 보호하려고 위장한 KGB 군사요원을 파견할 지경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타라키는 당내 경쟁자들과의 목숨을 건 권력투쟁에 사로잡혀 있었다. 타라키는 당내의 같은 파벌인 칼크파 소속인 하피줄라 아민 외무장관 겸 혁명위 부의장과도 반목했다.

친소정부를 수립한 1978년 쿠데타의 설계자들인 타라키와 아민은 서로가 양립이 불가함을 느끼게 됐다. 무엇보다도 반란 상황의 악화로 타라키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소련도 그에 대한 신임을 접게된다. 9월이 되자, 타라키는 소련의 호출로 모스크바로 갔다. 그의 부재 중에 아민의 타라키 축출이 계획됐다. 타라키는 귀국 뒤 아민과 총격을 교환하는 권력투쟁 끝에 결국 체포됐다. 몇 주 뒤 ‘위대한 스승’ 타라키는 카불의 한 병영에서 집중 사격을 받고 최후를 맞는다.

유혈 집권한 새 정권이 더 큰 재앙, KGB “미 CIA 요원” 퍼뜨려

아민의 집권도 결과적으로는 카불의 사회주의 정부, 특히 소련에게는 더 큰 재앙이 됐다. 소련은 아민의 집권을 묵인했지만, 그 후 그의 모호한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오판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잡게 된다. 미국 콜롬비아대에 유학했다가 학위 취득에 실패한 아민은 귀국 뒤 타라키 등과 함께 소련 KGB의 돈을 받는 관리 대상이었다. 그는 집권 뒤 거만해졌다. 카불의 KGB 요원들 입장에서 더욱 용납할 수 없었던 그의 월권은 돈 문제였다. 아민은 아프간 정부의 해외은행 구좌에 있던 4억달러나 되는 돈을 인출하는 권한을 가지려 했다.

아민에 대해 격노한 KGB는 그의 신뢰를 깎아내리려 했다. 미국 유학 경력이 있는 아민을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이라는 허위정보를 퍼뜨렸다. 이 허위정보는 돌고돌아서 KGB 본부와 소련 국내에도 흘러들었다. 정보 계통에서 이른바 ‘블로우백’이라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허위정보를 퍼뜨린 당사국조차도 나중에 그 정보에 현혹되는 현상이다.

정보 요원이 퍼뜨린 악정보가 본국에 역유입되는 블로우백이 발생한 것은 아민의 행적과도 관련이 있다. 아민은 집권 뒤 카불에서 미국 외교관들과 일련의 개인적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KGB는 그 만남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아민이 뉴욕에서 유학할 때 중앙정보국과 관련이 있는 아시아재단과 관련이 있다고 문건도 인도에서 나왔다.

KGB 요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퍼뜨린 허위정보가 사실일줄 모른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로 아프간공산당에 침투시키려고 미국이 심은 간첩일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본국에 아민이 이슬람 반군들과 타협할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했다. 이런 정책 방향은 사실 KGB가 타라키에게 조언한 유화책이었다. KGB와 소련 지도부는 갑자기 아민에 대한 의심으로 자신들의 조언도 팽개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아민은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관의 대리 대사인 브루스 암스튜츠를 5번이나 개인적으로 만났다. KGB는 미국의 의도를 평가하려고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아민과 암스튜츠의 대화 내용도 알 수 없었다. KGB 관리들은 중앙정보국이 아민과 협력해 카불의 친소정부를 조종하기 시작했다고 결론냈다. KGB는 11월 들어 최고지도자 브레즈네프에게 서한을 보내 아민이 “미국 대사와 수차례나 만났으나 소련 외교관들에게 그 만남에서의 대화 주제를 알리지 않고 있다” 단호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경고했다. 중앙정보국의 침투로부터 아프간 혁명을 구하려면, 아민을 죽이거나 공직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손에 들어가면 발 밑에 미사일 화약고 우려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에 보낸 개인적 보고서에서 “올해 9월 쿠데타와 타라키의 살해 뒤 아민이 자행한 대규모 탄압의 결과로 당, 군 및 정부의 기구들이 근본적으로 와해되면서 상황이 격화되고 있다”며 “동시에 서방으로의 정치적 편향 가능성을 미리 경고하는 아민의 비밀 행동들에 대한 경고성 정보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는 중앙정보국의 아민 포섭은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을 포함한 ‘뉴 그레이트 오토만 제국’을 만들려는” 중앙정보국의 거대한 음모의 일환이라는 상상력까지 동원했다.

안드로포프 입장에서는 이런 상상력이 나올만도 했다. 만약 아프간이 미국이 손으로 떨어진다면, 소련의 방공망이 취약한 남부 접경 지대가 더욱 취약해질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이 유럽에 배치중이던 중거리 퍼싱 미사일도 아프간에 배치할 수 있게 된다. 중거리 퍼싱 미사일은 장거리 미사일인 ICBM에 비해 정확도와 비용 면에서 우수할뿐만 아니라 대량으로도 생산할 수 있었다. 당시 미-소 군축협상에서 최대 논란거리였다.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과 가까이 있는 동맹국이 없어서, 퍼싱 같은 중거리 미사일을 미국을 향해 배치할 수가 없었다. 1960년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다, 세계대전 일촉즉발까지 간 상황이 있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그렇게 반발하는 중거리 미사일을 당시 서슴지않고 소련을 겨냥해 배치했고, 이를 더 추가로 배치할 지역을 찾고 있었다. 소련으로서는 여기서 그만두면 아프간에 개입하지 않으니만 못한 최악의 결과가 어른거리는 상황이었다.

안드로포프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아민을 교체하는 단호한 행동을 취하고, 아프간 공산주의를 정비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안드로포트와 브레즈네프의 권력 핵심들도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민을 암살하고 아프간에 대한 군사침공을 개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소련 지도부가 아프간 침공을 결정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민 때문만은 아니었으나, 아민 문제는 소련의 아프간 군사 침공의 결정을 촉진한 것은 분명하다. 아민 문제는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미국이 아프간에 개입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었기 때문이다.

미국 스파이?…미국은 되레 미 대사 피살 배후로 여겨

그럼 아민은 정말 미국이 스파이였으며, 미국은 아민을 통해 아프간에 개입한 것인가? 30년이 지난 지금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오히려, 미국은 아민을 비극적인 덥스 대사 피살 사건의 배후로 보는 등, 그를 통제할 수 없는 소련의 충실한 대리인으로 본 정황이 크다. 아민이 중앙정보국과 끈이 있다는 소문은 그 전부터도 떠돌았다. 덥스 대사도 이를 듣고, 피살 전에 중앙정보국에 직접 문의를 했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덥스 이후 대사 직무대리를 지낸 암스튜츠가 전했다. 만약 아민이 중앙정보국과 끈이 있었다면, 그를 관할해야 하는 부서인 중앙정보국 근동부도 아민과는 의미있는 접촉이 없었다고 밝혔다.

아민이 뉴욕에서 유학을 할 때나 나중에도 그런 접촉은 없었으며, 그가 정치인으로 활동할 때 외교만찬 등에서 잡담이나 나누었다는 것이다. 아민의 집권 뒤 그를 몇차례 만난 암스튜츠는 그 만남에서 대화가 형식적이고 비생산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아민은 미국으로 우호적으로 경사되기는커녕, 비타협적인 적대감을 보였다는 것이다. 암스튜츠에 따르면, 아민은 콜롬비아대에서 두 번이나 박사학위 시험에 실패한 모욕감 때문인지 미국에 대해 분노와 적개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아민이 당시 미국과 아무런 끈이 없었다는 것을 뒤집을 증거는 아직 없다.

1979년 11월 들어 이란에서는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가 발생했다. 25일에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도 미국 대사관을 이슬람주의 세력 시위대들이 휩쓸고 점령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 대사관 피습 사태는 이란에서처럼 인질사태로 비화되지는 않았으나, 파키스탄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비약적 성장을 나타내는 징후였다. 아프간 주변 정세가 요동치고 있던 때였다. 이란과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사건이 소련 지도부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큰 맥락에서 보면, 이슬람주의의 위협에 대한 인식을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가졌던 소련 지도부에게 그 위협에 대한 인식의 강도를 배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을 방치하면, 이슬람주의의 위협이 소련에게도 직접적으로 강타할 것이란 분석을 충분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아프간에 개입해야 할 절박성이 커졌다고 봤을 것이다. 미국의 대소 전진기지였던 이란과 파키스탄에서 이 사건이 상징하는 미국 영향력 축소는 미국으로 하여금 아프간 개입을 더 자극했을 것으로 분석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는 소련으로 하여금 역시 아프간 개입의 강도를 더 강화하는 변수들이었다.

이슬람세력 위협, 미-소 둘 다 개입 부채질…크리스마스 이브 진격

12월 들어 소련의 움직임은 시작됐다. 12월7일, 권력투쟁에 밀려 망명했던 아프간 인민민주당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바라크 카르말이 비밀리에 카불 인근 바그람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아민의 뒤를 잇기로 낙점된 그는 KGB 요원과 소련군 특전부대 병력과 함께 입국했다. KGB의 아민 암살 공작이 시작됐다. 공작원들은 아민 관사의 주방에 침투해서 음식에 독을 넣었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 아민은 이미 자신의 암살에 대한 우려로 가족들에게 먼저 음식을 시식하게 하는 등 수명의 시식자들이 있었다. 이 독살 시도는 아민 조카 중 한명에게 구토를 유발했을 뿐이었다. 다음날 저격수가 아민을 저격했으나, 빗나갔다. 아민 암살을 결국 소련군의 침공 때 관저를 전면적으로 급습하는 작전으로 변경됐다.

아프간에 친소정부를 수립하게 한 1978년 4월27일 쿠데타 뒤 카불의 대통령궁에 진주한 군 병력. 아프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친소정부를 수립케했으나, 그 후 당 내부 파벌투쟁으로 아프간 사회주의 세력 전체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아프간에 친소정부를 수립하게 한 1978년 4월27일 쿠데타 뒤 카불의 대통령궁에 진주한 군 병력. 아프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친소정부를 수립케했으나, 그 후 당 내부 파벌투쟁으로 아프간 사회주의 세력 전체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12월10일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은 소련군 참모총장에게 1개 공정사단과 수송항공대 5개 부대의 배치를 시작하라는 구두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 투르케스탄군구의 기계화 보병 2개 사단의 경계태세 강화와 연대 인원의 증원도 명령했다.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참모총장은 이 명령에 격앙됐다. 그는 군 병력으로 아프간의 상황을 안정시킬 수 없다며 이 결정을 “무모하다”고 반응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12월 중순이 되자, 소련군이 아프간 접경지대로 대규모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 중앙정보국도 이를 감지하고 12월19일 카터 대통령에게 긴급 비밀보고를 올렸다. 3일 뒤 보비 인먼 중앙정보국 차장은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소련이 72시간 내에 침공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보고를 했다. 중앙정보국이 예측한 시간보다 48시간이 더 지나서, 소련군의 전면적인 침공이 시작됐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이었다.

어둠이 깔리는 카불 국제공항에 소련의 안토노프 수송기들이 속속 착륙했다. 수송기에서는 소련의 공수부대 병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마스인 25일 새벽 소련군 40군이 아프간과 접경한 도시 테르메즈 인근 아무다르야 강을 일제히 도강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탱크들이 전면에 서서 굉음을 울리며 아프간 국경을 밀고 들어갔다. 유라시아 대륙 내륙 오지의 혹독한 겨울 추위가 위세를 떨치던 날이었다. 35년 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던 소련군 40군은 이런 혹독한 추위를 오히려 무기로 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2차대전의 승패를 갈랐다. 최신식 장비와 보급으로 무장한 소련군 40군에게는 그 때처럼 추위를 녹이는 조국방위의 열정이 있었을까? 최신식 무장과 보급에도 불구하고, 추위는 소련군 병사들의 마음 속까지 파고 들었을 것이다.

소련 정규군들이 침공을 시작하자, 카불에서는 아프간 정부군으로 위장한 700명 이상의 KGB 군사요원 아민의 대통령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민의 대통령궁을 완전히 진압하기까지 KGB 요원 수십명이 사망했고, 결국 아민도 사살됐다.

 아프간의 소련을 베트남의 미국처럼 수렁에 빠지게

소련군의 침공을 알리던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의 외교전문들이 속속 도착하던 워싱턴의 백악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깊은 숙고에 빠졌다. 카터 행정부 내에서 가장 강경한 냉전 전사였던 그의 머리를 사로잡는 문제는 이번 사태가 소련이 도를 넘는 조처였냐는 것이었다. 당시 그와 미국의 안보외교팀들은 아프간에 대한 중앙정보국 등 미국의 공작에 대한 소련의 피해의식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의 침공을 중동의 걸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아프간 친소정부를 유지하려는 절박한 행동으로 해석했다. 그럼 문제는 소련의 의지가 어느 정도이며, 그 노력이 성공할 것인가였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당했던 것처럼 소련도 아프간에서 대가를 치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소련은 베트남에서의 미국과 달리 아프간에서 단호하게 행동해서, 아프간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 여론의 발목에 잡혀, 베트남에서 머뭇거렸던 미국과 달리 소련은 아프간에서도 헝가리와 체코에서 일어난 반소련 시위 때처럼 단호하게 그 저항을 분쇄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침공 다음날인 26일 카터 대통령에게 보내는 비밀 정책보고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 개입에 대한 대책’을 보냈다. 그는 소련이 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행동을 옥죄였던 자기 의심과 자기 비판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우리는 아프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 너무 낙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전제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라고 물으며 다음과 같은 정책 조언을 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소련 볼세비키 혁명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소수 전위들이 대중을 지도하는 전략적, 전술적 유연성을 가르친 유명한 지침서이다. 브레진스키도 이를 준용해, 아프간에서 중앙정보국을 이용해 전략적, 전술적 유연성을 갖는 공작의 개요를 그렸다.

“아프간에서의 저항을 지속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반군들에 대한 무기 선적과 기술적 지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자금을 의미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는 파키스탄과 설득해서 반군을 지원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는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정책 재고를 요구하며, 더 많은 무기지원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안보정책이 핵비확산 정책에 의해 좌우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야 한다. 우리는 중국이 반군을 지원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반군을 지원하는 선전 활동과 비밀 공작에서도 이슬람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까지 용인하며 아프간 반군 지원 유도

브레진스키는 아프간에서 소련의 퇴치를 위해서라면, 파키스탄의 핵개발도 용인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다. 이는 사실 파키스탄의 핵무장으로 이끌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그 후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등 냉전 이후 미국의 최대 안보현안이던 핵확산 문제를 야기한 모델이었다. 따지고 보면, 현재 25년 가까이 계속되는 북한 핵개발 위기도 그 근원의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북한에게 기술적 지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선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는 1주일 뒤 보낸 보고서에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철수이다. 설사 이것이 달성 불가능할지라도, 우리의 소련의 개입을 가능한한 최대한 비용을 치르게 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을 무대로 한 미국과 소련의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게임은 브레진스키의 기대를 넘어, 소련에게 철수는 물론이고 체제 붕괴라는 비용을 치르게 했다. 하지만, 미국도 승자는 아니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자신의 돈과 무기로 이슬람주의 세력이라는 새로운 적을 키워냈고, 소련 붕괴 뒤 이들과 고투중이다.

20세기 전후 아프간을 무대로 한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결국 두 제국의 쇠락을 초래한 것과 비슷하다. 극동 지역으로까지 연장된 그레이트 게임은 러일전쟁을 초래하며,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이끌었다. 영국도 유라시아 대륙의 식민지 패권을 겨룬 마지막 상대인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우뚝서는 듯 했으나, 곧 쇠락의 길을 갔다. 후발 제국들인 독일과 일본의 등장,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뒤를 있는 소련의 출현은 영국을 패권국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했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중동대전 70년 http://plug.hani.co.kr/middleast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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