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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아프간 무자헤딘, 소련 영내까지 게릴라

등록 2013-11-29 15:53수정 2013-11-29 15:53

중동대전 <6>
미 CIA 무기지원 ‘뒷손’…최소 비용으로 최대 성과
4년만에 전국토의 62% 통제…소련은 갈수록 출혈
미국 중앙정보국이 제공한 구식 무기로 무장한 무자헤딘들은 산악과 사막 지대를 활용하는 게릴라 전법을 아프간 전역에서 많게는 수만건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소련군을 무력화시켜 나갔다. 1984년 아프간 무자헤딘의 한 집단.
미국 중앙정보국이 제공한 구식 무기로 무장한 무자헤딘들은 산악과 사막 지대를 활용하는 게릴라 전법을 아프간 전역에서 많게는 수만건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소련군을 무력화시켜 나갔다. 1984년 아프간 무자헤딘의 한 집단.

탱크 등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소련군은 곧 주요 도시와 이 도시들을 잇는 도로와 인근 지역들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 소련군은 붉은 화살표 방향으로 침공하면서 그 지역들을 장악해, 주요 도시를 잇는 가는 띠 모양의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진입하지 못한 아프간의 광막한 황야와 산악 지대는 무인지경으로 그대로 남았다. 무자헤딘들의 무대가 됐다.

주요 도시 외 광활한 황야와 산악 지대는 무자헤딘의 무대

소련군 개입 1년 전부터 군사 활동을 시작한 무자헤딘들은 소련군 침공을 전후해 시작된 미국 중앙정보국의 무기 지원을 받으면서 갈수록 활동력을 높여갔다. 아프간의 도시와 농촌에 있는 민간인들도 소련군을 침략군으로 받아들이면서, 반감의 폭과 강도는 커져만 갔다. 소련군이 완전히 장악한 수도 카불에서도 밤마다 지붕 위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서 “알라루 악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기도문을 외치면서 소련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했다.

소련군과 탱크는 카불 등 주요 도시에서 벌어진 가두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시간이 가면서, 아프간의 지식인, 공무원, 심지어 운동 선수들까지 무자헤딘 쪽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1981년 연말이 되자, 아프간의 29개주 거의 전역에서는 무자헤딘들이 자유롭게 활개를 쳤다. 그들은 매복하여 소련 수송대를 공격하고, 도시와 마을에 대한 기습도 점점 강화했다. 공격의 빈도는 잦아졌다.

무자헤딘의 강화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무기 지원과 이를 중계한 파키스탄 정보부(Inter-Services Intelligence, ISI)의 역할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1979년 12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승인하고, 곧 이어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승인한 최고기밀 대통령령에 의해 중앙정보국의 임무는 무자헤딘들에게 은밀하게 무기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령을 담은 기밀문서에서 소련군에 대항하는 중앙정보국의 목적은 ‘교란’(harassment)이었다. 아프간에서 소련군의 개입 비용을 높이자는 것이다. 소련이 제3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침공을 저지하자는 의도였다. 중앙정보국도 아프간 전장에서 명백한 승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보국이 직접 개입할 경우 발생할 위험성 때문에, 그 공작은 파키스탄을 통하도록 했고, 중앙정보국도 파키스탄 정보 당국과의 연계를 강조했다.

소련군의 침공 경로와 그 이후 세력권. 소련군을 주요 도시와 이를 잇는 지역만 통제했을뿐, 아프간의 광막한 사막과 산악 지대는 무자헤딘들의 무대가 됐다.
소련군의 침공 경로와 그 이후 세력권. 소련군을 주요 도시와 이를 잇는 지역만 통제했을뿐, 아프간의 광막한 사막과 산악 지대는 무자헤딘들의 무대가 됐다.

전국 동시다발로 2만~4만건 게릴라 전투전

처음으로 전해진 무기는 단발 수동식 .303 리엔필드(Lee Enfield) 소총이었다. 1950년대까지 영국군 보병의 표준 무기였다. 무거운 개머리판과 구식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정확성과 힘에서는 아프간 정부군이 쓰는 공격용 소총인 AK-47보다도 우수하다고 중앙정보국은 판단했다. AK-47은 간편하기는 하나, 소음이 크고 정확도에서는 떨어졌다. 중앙정보국의 조달관들은 그리스, 인도 등지에서 리엔필드 소총을 다량 구입해서, 파키스탄의 항구 카라치로 선적했다. 중앙정보국은 또 총류탄 발사기인 RPG-7도 수천발이나 구입해서 전달했다. RPG-7은 값이 싼데다, 휴대가 간편해서, 소련군의 탱크를 저지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이런 무기들을 지원받은 무자헤딘들의 전황은 기대 이상이었다. 앞서 지적한대로 1981년 연말이 가까이 오면서 무자헤딘들은 아프간 전역을 자유롭게 활개치고 다녔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의 대아프간 공작의 최일선 부서였던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지부장인 하워드 하트의 추산에 따르면, 아프간 전역에서 무자헤딘들은 많을 때에는 동시에 2만~4만건의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의 장점인 압도적 화력과 최신식 무기는 50~100명 정도의 집단을 이뤄서 전국에서 동시에 수만건의 게릴라 전투를 벌이는 무자헤딘들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하트는 “그 전쟁을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잘한 것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보국은 무자헤딘들에게 무기만 던져주면 무자헤딘들이 알아서 소련군들을 괴롭혀 나간 것이다.

1981년 5월 부임한 하트도 곧 무자헤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지않을 수 없었다. 그 해 가을 방콕에서 열린 중앙정보국 지부장 회의에서 하트는 무자헤딘들에게 공급할 새로운 무기 리스트를 주머니에 넣고 참석했다. 무자헤딘 세력에 대해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그는 회의에서 지부장들과 랭리의 중앙정보국 지도부에게 촉구했다. 이 회의에서도 무자헤딘들에게 지원을 늘리면 그에 상응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분위기였다. 문제는 소련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였고, 이는 결국 워싱턴 지도부의 정치적 판단의 문제였다.

사우디도 가세, 미국 공식 지원예산만큼 지원

워싱턴 지도부도 아프간 전쟁의 잠재력에 눈을 떠갔다. 1981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롭게 중앙정보국장으로 취임한 윌리엄 케이시는 워싱턴에서 아프간 전쟁의 효용을 설파하는 전도사였다. 워싱턴 지도부 역시 1981년 이후에는 소련과의 무한대결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중앙정보국 지도부와 현장 요원 양자가 의견이 일치하는 아프간 전쟁의 확대는 사실상 불가피했다.

무자헤딘들은 구식 무기를 가지고 느슨한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음에도 소련군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하트는 이슬라마바드의 지부 사무실과 자신의 집에서 매일매일 아프간 현지에 심어놓은 정보요원들의 보고를 받아서 부서진 소련군의 탱크 대열, 격추된 소련군 헬기 등의 피해상황을 본부에 보고했다. 1982년 1월 하트는 더 우수하고, 더 많은 무기 지원을 본부에 다시 요청했다. 1982년 들어서부터 워싱턴의 아프간 전쟁 지원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1981년 회계연도(1980년 10월~1981년 9월)에 3천만달러였던 아프간 반군 지원 예산은 1984년이 되면 2억달러로 늘었다. 약 7배의 증가이다. 그뿐만 아니다. 아프간 반군 지원 예산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지원과도 연계됐다. 일종의 매칭 펀드였다. 미국 정부의 공식 지원 예산만큼 사우디도 아프간에 지원한다는 협정이 레이건 대통령과 사우디 왕가 사이에 맺어졌다.

나중에 자세히 더 상술하겠으나, 사우디 왕가 정부는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형제 이슬람 국가에 대한 무신론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막는 성전을 지원할 도덕적 명분이 있었다. 또 국내적으로는 1970년대말부터 들끓기 시작한 이슬람주의 세력의 압력이 증가하는데다, 이들의 관심을 국외로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우디 쪽의 아프간 반군에 대한 지원도 정보기관인 총정보국(GID)의 몫이었다. 투르키 알파이잘 왕자가 이끄는 사우디의 정보기관인 GID는 사실상 아프간 반군 지원을 하면서 정보기관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사우디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일달러로 무장한 GID와 그 수장인 투르키 왕자는 아프간 반군과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가장 관대한 후원자였다. 사우디 쪽의 지원을 합치면, 1984년이 되면 아프간 반군에 대한 공식적 지원은 4억달러로 된다. 물론 이는 1981년 한해에만 아프간의 사회주의 정부에게 10억달러를 지원한 소련 쪽의 지원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쪽의 지원 효과는 소련에 비해서는 수백배였다.

구식무기시장 때 아닌 활황…소련제 무기 총구가 소련으로

아프간 반군에 대한 지원이 급증하자, 전 세계 무기시장에서 폐기 직전이었던 재고 구식무기는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는 아이템으로 갑자기 떠올랐다. 새롭고 더 강력한 무기들도 아프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리엔필드 .303 소총 수십만정이 이미 쏟아져 들어온 상태에서 중국제 AK-47 소총도 지원되기 시작했다. 아프간 정부군의 병사들의 주화기인 AK-47은 당초 중앙정보국이 지원을 유보한 무기이기는 했으나, 그 기동성과 편리함 때문에 반군과 게릴라들에게는 여전히 고전적 화기였다. 총류탄인 RPG-7에 이어, 60mm 중국제 박격포가 추가되고, 12.7mm 기관총 2천세트까지 공급됐다. 전형적인 공격형 무기들이다.

중앙정보국은 주로 공산권에서 생산된 무기들을 구입해 아프간 반군들에게 지원했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감추기 위한 의도도 있었고, 소련을 제외한 다른 공산권 국가들이 아프간 지원에 개입시켜 공산권을 분열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중앙정보국 본부에는 아프간 반군 무기 조달 태스크포스팀이 꾸려져, 전 세계 무기시장에서 공산권제 재고 구식 무기들을 구입했다. 소련이 무기를 지원했던 이집트 등 제3세계뿐만 아니라 폴란드 등 소련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던 동구 위성국가들의 부패한 군 장교들도 이 거래에 개입했다. 폴란드군의 장교들은 은밀히 소련제 재고 무기들을 중앙정보국에 팔아넘기며 수익을 챙겼다. 당시 폴란드는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이 반소운동으로 불붙으며, 체제 이완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앙정보국의 폴란드군 재고 무기 구입은 자유노조 지원 공작과도 궤를 같이 했다. 소련이 폴란드에 지원한 무기들은 이렇게 은밀히 아프간 반군으로 넘어가, 소련 자신을 위협하는 무기로 탈바꿈했다.

중국이 가장 깊숙이 개입, 소련 포위망 뚫고 돈도 벌고

아프간 반군에 대한 무기 지원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1960년대 국경분쟁을 거치면서 소련과 적대관계로 변한 중국은 아프간 반군 지원을 통해 자신에 대한 소련의 포위망 돌파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득도 챙기는 일석이조의 장사를 했다. 베이징 주재 중앙정보국 지부가 직접 베이징 당국과 협상해서, 매년 수천만달러의 무기 거래 계약을 체결했다. 제3세계의 미국 동맹국들도 이 장사에 뛰어들었다. 이집트는 1950~60년대 소련이 자신들에게 팔았던 구식 무기들을 중앙정보국에 재판매했다. 터키는 6만정의 소총, 8천대의 경기관총, 1만정의 권총, 1억발의 탄환을 팔아넘겼다. 주로 1940-42년 연식이었다. 폐기 직전의 구식 무기들로 장사를 한 것이다.

심지어, 아프간 반군에 무기 공급 중개역할을 하던 파키스탄도 이 장사에 끼어들었다. 파키스탄군은 자신들의 재고 .303 소총과 약 3천만발의 탄환을 은밀하게 팔아넘겼다. 싱가포르 선적의 화물선이 파키스탄의 항구 카라치에서 10만정의 총을 선적하고 공해로 나갔다가는 곧 회항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총들이 마치 외국에서 온 것처럼 하역됐다. 하역된 탄환에는 ‘파키스탄군수공장’이라는 뜻의 ‘POF’이라는 표시가 여전했다. 파키스탄 정보부는 탄환에 새겨진 이 글씨를 일일이 지워야 하는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표시가 있는 무기 사용을 그대로 용인했다가는, 파키스탄의 아프간 반군 지원을 공식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파키스탄으로 반입된 무기들은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통해 아프간으로 실려갔다. 아프간 카불에서 방글라데시 치타공까지 이어지는, 인도아 대륙의 동서를 횡단하는 2천년이 넘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는 아프간 반군에 전해질 일제 도요타 픽업트럭들로 붐볐다. 카라치에서 하역된 무기들은 일단 라왈핀디의 집하장으로 옮겨진 뒤 다시 아프간 국경을 따라 늘어선 무기 창고로 실려가서, 무자헤딘들에게 배분됐다.

1983년으로 접어들자, 중앙정보국의 이런 비밀공작은 비용 대비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점점 확실해졌다. 소련은 아프간 수렁에 빠졌고, 이 전쟁은 국제사회에서 모스크바 당국을 계속 궁지로 몰아넣었다. 중앙정보국 이슬라마바드 지부장 하트는 중앙정보국 본부 랭리로 이런 전황들을 계속 보냈다. 매해 미 의회가 무자헤딘의 무기를 위해 배정하는 예산은 소련군의 장비를 파괴하는 한편 소련군 병력 손실을 침공 때보다도 8~10배 가까이 증가시켰다고 하트는 보고했다.

아프간 전쟁 상황을 살피기 위해 파키스탄에 방문한 상원의원 패트릭 모이니한이 하트에게 “무자헤딘들이 결국 소련군에 의해 사살당하거나 분쇄당하면,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고 물었다. 하트는 “상원의원님, 무자헤딘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윈스턴 처칠의 말입니다. ‘우리에게 무기를 다오. 그러면 우리는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2차대전 때 처칠이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에게 군수지원을 촉구할 때 한 말이다. 무자헤딘들에게 무기만 지원하면 그들이 알아서 소련군을 괴롭히고 수렁에 빠뜨릴 것이란 말이다.

1만7천명 사상, 전투기 250~300대 추락, 탱크와 장갑차 2750대 파괴

1984년 1월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장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안보팀에게 아프간 전쟁 비밀공작의 진전을 보고했다. 무자헤딘에게 전해질 소총 리엔필드가 카라치에 처음으로 하역된 뒤 4년만이었다. 중앙정보국의 비밀 평가에 따르면, 무자헤딘들은 소련군 1만7천명을 사상시켰다. 250~300대의 소련군 전투기가 추락됐고, 2750대의 소련군 탱크와 장갑차, 8천대의 트럭, 지프 등 수송차량들이 파괴됐다. 무자헤딘들은 아프간 국토의 62%를 통제했다. 무자헤딘들은 갈수록 위력적이 되어서, 소련군이 그 저항을 진압하려면 병력의 3~4배나 증원해야만 했다.

이 전쟁은 이미 소련에게 직접원조로만 120억달러를 지불하게 했다. 소련에게 이런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미국이 쓴 돈은 2억달러, 이에 매칭된 사우디의 2억달러 등 모두 4억달러라고 케이시는 강조했다. 취임 이후 아프간 전쟁의 열렬한 전도사가 된 케이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대담한 공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프간 반군들이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로 진입해 소련령 중앙아시아 자치공화국 내의 무슬림들을 선동하는 공작도 감행했다. 박격포와 보트, 작전지도뿐만 아니라 중앙정보국이 우즈벡어로 인쇄한 코란들을 소지한 아프간 반군들은 은밀히 아무 다르야 강을 넘어 소련 영내로 진입했다. 소련군이 1979년 12월 침공 때 넘었던 강이 이제는 아프간 반군들이 소련 영내 진입의 통로가 됐다. 소련 영내에서 외부 세력이 후원한 폭력적인 게릴라 활동이 벌어진 것은 1950년대 초 처음이다.

소련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서 아프간을 침공했으나, 오히려 영내에서 게릴라 활동을 허용하는 안보위기를 초래하는 궁지로까지 몰렸다. 아프간 전쟁 공작은 2차대전 이후 중앙정보국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최대의 성과를 올린 가장 성공적인 공작으로 입증되고 있었다. 중앙정보국의 이런 성공적 공작에는 파키스탄과 그 정보부(ISI)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정의길의 중동대전 http://plug.hani.co.kr/middleast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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