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알사우드 왕가와 동맹을 맺은 와하브의 초상화. 사막의 완고한 금욕주의 종교지도자 와하브는 알사우디 왕가에 종교적으로 헌신하는 전사들을 양성해, 사우디 반도를 석권케하는 힘과 이념을 제공했다.
와하브는 1703년 네지드의 한 오아시스 마을인 유야나의 이슬람 율법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법학자이자 이슬람 재판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쿠란과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며 재능을 보였다. 와하브는 공부를 계속하려고 메디나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스승으로부터 이븐 타이미야의 저작을 읽고 와하비즘이라고 일컫는 자신의 신학 기초를 닦았다.
타이미야는 몽골이 13세기 이슬람 세계를 침략해 초토화한 때 시리아의 금욕적인 신학자이자 법학자이다. 그는 몽골의 침략과 대학살로 이슬람 세계가 초토화된 상황에서 절망에 빠진 이슬람의 살길을 모색했다. 그는 몽골의 이슬람 세계 침략은 무슬림들이 진정한 이슬람을 배반해서 신의 버림을 받은 결과라며, 이슬람의 본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선지자 무함마드 시절의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복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의 신학은 이슬람에는 잘못된 것이 없으며, 다만 무슬림들이 이를 실천하지 않아서 약해지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이슬람이 승리의 길을 되찾으려면 이슬람 본래의 모습, 즉 선지자 무함마드 시절과 쿠란 자체로 돌아가 온갖 새로운 해석과 사상, 혁신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지하드를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했다. 그가 말하는 지하드는 ‘검을 잡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지하드에 머물지 않고 무슬림 공동체를 확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도 불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지하드 사상은 면면히 이어져 현대 이슬람주의 지하드 사상의 기초가 됐다.
성스러운 무슬림 공동체 방해하면 누구라도 제거
타이미야의 저작을 접한 와하브도 이슬람에 온갖 학파와 사상이 난무하고, 당시 쇠락하고 타락한 이슬람 세계의 원인이 진정한 이슬람의 실종, 쿠란과 무함마드 초기 시절의 이슬람을 지키기 않아서 일어난 것으로 진단했다. 사막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 본래의 모습의 복원을 알리는 설교를 시작했다. 와하브는 모든 이는 무함마드의 계시가 세운 율법을 그대로 복종해야 하며, 무함마드 시대의 순수한 초기 메디나 시절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는 특히 초기 무슬림들의 성스러운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방해한다면 그것이 누구라도 제거돼야 한다고 지하드의 개념을 더욱 공격적으로 발전시켰다. 타이미야에게 지하드는 사상으로 머물렀으나, 와하브에게 지하드는 실천으로 나아갔다.
추종자들을 끌어 모은 그는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무함마드와 쿠란이 금지한 우상숭배 금지를 철저히 따라, 당시 온갖 장식물로 치장된 사원과 묘지 등을 파괴하는 운동을 벌였다. 또 그는 메카와 메디나 순례를 오는 이집트와 터키인 귀족들에 치를 떨었다. 담배를 피고, 해시시를 씹으며, 음악을 즐기고, 몸에 온갖 장식을 하는 그들은 와하브에게 우상을 숭배하는 불경스런 이단자들이었을 뿐이다.
세를 불린 그는 재판관에 올라 엄격한 율법 적용을 하며, 주민들과 갈등을 조금씩 자아냈다. 그는 간음한 혐의를 받은 한 유명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라는 판결을 내면서 축출된다. 그의 엄격한 율법 적용에 시달린 주민들이 그를 오히려 쳐죽이려 했다. 그는 그곳에서 도망쳐, 다리야라는 오아시스 마을로 피신했다.
순교도 불사하는 전투력과 엄격한 율법 기강
그는 그곳에서 아라비아 반도의 미래를 결정할 해후를 한다. 이곳의 통치자이자 알사우드 가문의 수장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를 만나 사우드-와하브 동맹을 맺은 것이다. 소규모 부족장이었으나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이라는 큰 야망을 가졌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와하브와 그 추종자들에게서 자신의 야망을 뒷받침한 이데올로기를 발견했다. 와하브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게서 자신들의 교리를 실천할 도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동맹은 단순한 사막의 전투적 부족과 종교집단 무리들을 지하드 개념으로 무장한 이슬람 전사집단으로 거듭나게 했다. 지하드 개념에 바탕한 사우드-와하브 동맹군은 순교도 불사하는 전투력과 엄격한 율법 준수와 기강으로 오합지졸의 다른 부족을 압도하는 한편 통치집단들의 타락에 넌더리를 내던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부족에게 ‘개종하라, 개종하라, 개종하라’고 세 번 외치는 개종을 요구했고, 이를 무시하면 죽여버렸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무슬림이며, 자신들의 이슬람만이 진정한 이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무슬림들에게 개종을 명령한 것이다. 그들의 동맹은 위력을 발휘해, 수십 년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 부족 대부분을 사우드-와하비의 통치권 아래 통합했다.
1766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암살됐지만, 그의 아들 압둘 아지즈는 와하브와 그의 추종자와 함께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 과업을 계속 실행해 나갔다. 와하브는 말년에 궁벽한 사막 지대로 은거하면서 종교적 명상을 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20명의 부인과 셀 수 없이 많은 자녀들을 남기고 죽었다. 아지즈는 와하브의 계승자로 자임하며 정치권력은 물론이고 종교적으로 최고 권력을 차지했다. 아지즈는 시아파의 시조격인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이 순교했던 카르빌라를 침략해, 시아파 무슬림 2천 명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들은 결국 1804년 성지 메디나를 침략해, 우상숭배로 자신들이 규정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료 무덤들을 파괴하고, 메카로까지 진격했다. 메카에서는 무함마드의 출생지를 표시한다고 알려진 사원까지 초토화했다. 무함마드를 우상숭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 세계사 무대 재등장
그들은 1811년 마침내 아라비아 반도의 통치자로 자임하던 오스만 터키 제국 심장부인 현재의 터키 땅인 소아시아로 진격할 군사작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기세는 마치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를 휩쓸고 사방으로 진격하며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던 초기 무슬림 군대와 같았다. 마침내 터키의 황제 술탄도 이들 베두인족들의 흥기를 좌시할 수 없다고 보고,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알리는 현대적인 군대를 이끌고 아라비아 반도로 가서는 1815년 아지즈의 군대를 박살내고 메카와 메디나를 다시 오스만 터키의 지배로 돌려놓았다. 이슬람권의 수장임을 자임하는 술탄은 메카와 메디나를 다시 모든 무슬림들에게 개방했다. 아지즈의 아들이자 계승자를 이스탄불로 데려가, 군중의 조롱 속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아라비아 반도를 휩쓸던 사우드-와하브 동맹은 잠잠해졌으나, 끝은 아니었다. 처형당한 알사우드 부족장에게는 아들 한 명이 남아 잔존 세력을 규합해, 사막의 작은 부족세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들은 여전히 와하비파였고, 자신들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는 와하비 울라마가 주도하고 번성했다. 와하비야 운동과 알사우드 가문은 그렇게 더 한 세기를 살아남아서, 20세기 초 부활한다.
그들의 후예들은 포연을 중동에까지 퍼뜨린 1차대전 와중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이름과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 전 세계 대중들에게 알려진 한 영국 첩보장교와 함께 세계사의 무대로 다시 등장한다.
정의길기자 Egil@hani.co.kr
▶정의길의 중동대전 70년 http://plug.hani.co.kr/middleast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