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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외국인 가사도우미 과로·학대…1년치 월급 빚지고 홍콩으로

등록 2023-09-23 09:00수정 2023-09-23 23:49

[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
2021년 5월 홍콩의 이동식 검체 채취소에서 외국인 가사노동자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EPA 연합뉴스
2021년 5월 홍콩의 이동식 검체 채취소에서 외국인 가사노동자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EPA 연합뉴스

일요일 낮 홍콩과 싱가포르의 도심을 처음 걸어본 사람이라면 낯선 풍경에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의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여성들이 왜 한자리에 모여 돗자리를 깔고 담소를 나누며 여가를 보내고 있을까? 그들은 왜 집에서 쉬거나 쇼핑센터에 가지 않지?

16시간 싼 노동 끝엔 ‘사람’ 없어

답은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마음 편히 몸을 누일 집이 없고, 도시 생활을 충분히 누릴 돈이 없다. 홍콩에는 필리핀·인도네시아에서 온 40만명의 여성 가사노동자가 있는데, 모두 ‘외국인 가사도우미’ 비자를 얻어 일한다. 그들은 고향의 브로커에게 약 1년치 월급을 빚으로 지고 이곳에 왔고, 홍콩의 에이전시에 이중 중개료를 주며 일할 곳을 찾는다.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나, 노인이 있는 가구에서 빨래와 청소, 요리 등 온갖 가사노동을 전담한다. 홍콩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정책은 ‘입주’를 의무로 하기 때문에 고용주의 집에 얹혀살아야 한다. 표준근로계약서는 “가구가 비치돼 있고, 적절한 사생활이 보장”돼야 한다고 명시하지만, 지켜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홍콩 평균임금이 꾸준히 상승하는 와중에도 외국인 가사노동자 임금은 거꾸로 하락했다. 오늘날 가사노동자들에게는 시민권·영주권자 기준 법정 최저임금의 60% 수준인 4730홍콩달러(약 80만원)가 최저 한도로 적용되는데, 1인당 국민생산 5만달러에 육박하는 이 도시의 물가를 고려할 때 턱없이 적은 돈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주 여성 가사노동자들은 유일하게 여가가 허락된 일요일 낮에 도심 곳곳에 쪼그려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홍콩 내 가사노동자의 기원은 영국 식민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초 중국 대륙은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봉건사회 권력과 근대 개혁세력 간 대결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당시 많은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홍콩으로 왔는데, 부유한 영국인 가정은 이렇게 피난 온 10대 여성들을 ‘무이차이’(妹仔)라고 부르며 식모로 뒀다. 현대 홍콩의 영광과 풍요는 이런 난민들의 피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4년 엄청난 재정 적자와 높은 실업률로 힘겨워하던 마르코스 독재 치하의 필리핀 정부는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노동자들을 국외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글로벌 금융·무역도시로 부상하던 당시 홍콩의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중국 개혁개방 정책으로 홍콩에 있던 공장들이 대거 대륙으로 진출했고, 마케팅·금융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기업들은 이 틈을 메우기 위해 가사노동을 전담하던 여성들을 국내 산업에 동원해야 했고, 이는 곧 이주 가사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송출 노동자들은 여성과 서비스업에 편중됐고, 홍콩 여성의 경제참여율은 1982년 47.5%에서 2013년 54.7%까지 증가했다. 오늘날 홍콩에서 가사도우미를 둔 가구는 8가구당 1가구이고, 자녀가 있는 경우엔 3가구당 1가구일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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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공공돌봄 지원 예산 삭감하고

한데 이 제도에는 ‘사람’이 없다. 가사노동을 비천하고 저렴한 노동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인식은 물론이고, 노동시간에 대한 의무규정조차 없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6시간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고, 휴게시간도 47% 정도만 보장받으며 일한다. 2017년 4월4일 46살 필리핀 여성이 어느 날 침대에 쓰러진 채 사망했다. 새벽 3시에 시작해 늦은 밤에 끝나는 과로가 사인이었다.

홍콩의 아시아 가사노동자 노조연맹은 이주 가사노동자의 35.8%가 여권·근로계약서를 고용주에게 빼앗긴 채로 일하고, 상한 음식이나 고용주 가족이 먹다 버린 음식을 제공받은 경우가 46.3%에 달한다고 2018년 1월 국제노동기구 회의에서 밝혔다. 언어·신체·정신적 학대를 경험했다는 응답도 55.2%였다. 지친 몸을 누일 취침 공간에서는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고,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은 거실이나 부엌, 발코니, 계단 아래 공간, 화장실 같은 곳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이런 사정은 싱가포르도 다르지 않다. 1978년 제정된 외국인가정부제도는 초기 5천명에서 출발해 이제는 25만명으로 증가했다. 한데 이 제도 역시 이주 가사노동자들을 노동법과 산재보상법 대상에서 제외해버린다. 무엇보다 싱가포르 정부는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시민들에게 보증금을 납부하도록 하고 가사도우미의 범법 행위에 연대 책임을 묻고 있어, 고용주의 통제와 억압을 양산한다. 고용주들은 가사도우미의 외출을 엄금하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의 통화까지 가로막는다. 최근 10년 사이 싱가포르에서 가사도우미 학대와 자살, 과로사가 빈번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도가 너무 심해 인도네시아나 미얀마 정부가 나서서 파견 중단을 선포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육아도우미 고용에 월 200만~300만원이 드는데 싱가포르 외국인 가사도우미는 월 38만~76만원 수준”이라며, 정부에 ‘외국인 육아 도우미’ 정책 도입을 촉구했다. 그 결과 고용노동부는 ‘외국인 가사근로자 시범사업 계획안’을 발표했다. 오는 12월 필리핀 출신 노동자 100명을 비전문인력 고용허가제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한국도 ‘돌봄노동의 국제분업화’ 대열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됐다.

가사·양육 부담이 늘어나는 저출산 고령화의 경고음이 들리는 시대에 이주노동자를 환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번 시범사업이 “최저임금 미적용”이라는 구상 아래 만들어졌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최근 정부는 돌봄서비스의 영리화를 추진하고 있다. 공공돌봄 지원기관인 사회서비스원 예산 148억원을 전액 삭감하고 공공성을 제거해버렸다. 이와 같은 사회서비스 시장화는 기존 요양보호사들의 처지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새롭게 맞이할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도 추락시킬 것이다. 가정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참여한 고용주 가정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왜 나쁜 사례를 베끼려고 하는 것일까? ‘사람 장사’나 하려는 게 아니라면, 참극의 출현을 반길 이유라도 있는 걸까?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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