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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지정학적 충돌 더 격렬해진 ‘신냉전’, 역사는 되풀이되나

등록 2021-12-24 04:59수정 2021-12-27 09:22

[소련 해체 30주년-상] 소련 붕괴 이후 세계는 달라졌나

30년전 급작스러운 소련 해체
“역사의 종언” 호언도 들렸지만
새 국제질서 열었는지 회의적

옛 소련 노동력·자본 투하만으로
동유럽 위성국가 군대 주둔 등
‘세력권’ 유지 비용 감당 못해 붕괴

냉전 이후 ‘비군사지대화’ 대신
나토 동진·우크라 위기 등 빈발
힘겨루기 치닫는 냉전양상 재연
러시아 공산당 지지자들이 21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 탄생 142주년을 기념하는 푯말을 들고 있다.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러시아 공산당 지지자들이 21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 탄생 142주년을 기념하는 푯말을 들고 있다.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새 체제가 작동할 시간을 갖기 전에 옛 체제가 붕괴됐다.”

30년 전인 1991년 12월25일 저녁 사임과 함께 소련 해체를 공식 선언한 미하일 고르바쵸프 당시 소련 대통령은 크렘린궁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끝난 냉전 질서를 대체하는 새 체제를 만들어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답은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소련 붕괴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평가까지 낳았다. 미국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와 경쟁하던 서구의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는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냉전이 끝나며 인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지정학적인 대결 역시 끝날 것으로 생각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1990년 걸프전을 시작으로, 지난 8월 미군의 일방적 철수로 끝난 20년 간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전쟁과 분쟁은 더 빈발했다. 유일 패권국이 된 미국은 냉전 시기보다 더 빈번하고 직접적으로 군사 개입을 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의 일극 체제는 어느 새 끝나고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부활’로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대결은 더 강력하게 부활했다. 냉전 시대에 오히려 ‘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냉전사가 존 루이스 개디스의 평가는 이제 학문적 정설이 됐다.

고르바쵸프가 의도한 새 체제가 작동하기 전에 왜 옛 체제가 급속히 붕괴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 탐구 대상이다. 고르바쵸프가 옛 체제를 대체하려 꺼낸 프로그램인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가 아니었다면, 소련 체제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생존했거나 적어도 더 오래 존속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소련 체제가 붕괴한 핵심 원인은 이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소련 경제는 생산성 향상이 아닌 노동력과 자본 투입 증가라는 양적 요소에 의해 지탱됐다고 노벨상 수상 경제학가 폴 크루그먼은 분석했다. 이 경제 모델이 한계에 이르며 미국에 맞서 군비경쟁을 이어가고, 동유럽 위성국가와 소련 연방 내 공화국들을 유지하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 나서며 옛 체제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며 급속히 붕괴된 것이다.

생산성 향상이 없어서 이미 1960년대초부터 스태그네이션에 빠진 소련 경제가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에너지 자원과 때마침 터진 오일 쇼크 때문이었다. 1970년대 터진 오일 쇼크로 미국 등 서방 자본주의 국가는 대공황에 준하는 침체에 빠졌지만, 소련은 폭등한 원유 판매 수입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데 머물지 않고 제3세계로 개입을 확대했다. 그와 동시에 중동 산유국들은 ‘오일 머니’로 소련제 무기를 대거 사들이며 제국의 빈 주머니를 채웠다. 서방은 오일쇼크를 계기로 지식산업으로 혁신에 들어간 반면, 소련은 기존의 비효율적인 중공업 체제를 존속시키며 혁신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소련은 이렇게 벌어 들인 돈을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체제 유지와 군비 증강에 투입했다. 나아가, 제3세계 분쟁에 개입을 확대하다가 1979년 아프간 침공이라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소련의 국력 과잉전개는 1980년대 이후 석유값이 폭락하자 체제를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미국의 저명한 소련사가 스티븐 코티킨 프린스턴대 교수를 오일 쇼크가 소련에게는 “역사의 잔인한 속임수”였다고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 붕괴의 핵심 원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련의 집착해온 ‘세력권 유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소련은 미국 등 서구의 강력한 저항에도 점령한 동유럽 전역을 자신의 위성국가로 만들면서 냉전의 한쪽 당사자가 됐다.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위성국가화한 것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략 등 역사적 경험을 통해 충분한 ‘완충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소련 체제에 끊임 없는 부담을 지웠다. 동유럽 국가들에 주둔하는 소련군의 주둔 비용에 더해 이들 국가에서 일어나는 반소운동은 소련 체제의 정당성을 갉아먹었다. 결국, 석유값 폭락과 함께 시작된 1980년대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시작으로 동유럽 국가들에서 반사회주의·반소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고, 결국 소련이 붕괴되는 시발점이 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을 핀란드와 같은 중립지대로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 등은 저서 <외교>에서 동유럽이 핀란드처럼 됐다면, 소련은 체제 유지와 안보에 훨씬 더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소련 붕괴 이후 지난 30년 간 국제질서를 주도해 온 미국에 적잖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냉전 이후 동유럽 국가 내에선 비군사지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 등은 러시아의 반대에도 끊임 없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동진시켰다. 러시아가 반발하며 우크라이나 위기 등 옛 냉전과 같은 지정학적 대결이 재연됐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선 한-미-일 3각 협력,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인도 등의 협의체 ‘쿼드’,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가 뭉친 군사 협의체인 ‘오커스’ 등을 통해 중국을 겹겹이 포위하는 세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시도한 봉쇄 전략을 연상케 한다. 현재 세계 정세를 두고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미국은 지난 8월 아프간 철군을 둘러싼 혼란에서 보듯 9·11테러 이후 중동에서 벌여놓은 ‘테러와의 전쟁’도 아직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모습은 소련이 붕괴 직전 미·중과 ‘두개의 전선’에서 대결하고, 다른 한편에선 아프간 전쟁의 수렁에 빠진 상황과 비슷하다. 올해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집권 이후 미국은 중국과는 대만 해협에서, 러시아와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맞서 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맹 규합에 집착하고 있다.

30년 전 소련은 미국에 맞서 세력권 유지와 확장에 집착하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다.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지 않지만, 역사 속 오류는 반복된다. 아프간에서 19세기 영국이 겪은 재앙을 20세기에 소련이 반복하고, 21세기에 미국도 이어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소련이 붕괴된 지 30년이 됐지만, 국제질서는 냉전 시기보다 더 불안정해졌다. 이는 인류가 소련 붕괴의 교훈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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