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휴전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우크라이나 쪽 협상단 일부가 독극물 중독 의심 증세를 겪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등이 2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아브라모비치와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루스템 우메로프 그리고 또 다른 인물 한 명이 지난 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모임을 한 뒤,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 나고 피부가 벗겨지는 증상을 겪었다고 익명의 소식통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특히, 아브라모비치는 몇 시간 동안 앞을 보지 못했고 음식물 섭취에도 장애를 겪었다고 전했다.
영국 프로축구 구단 첼시의 구단주인 아브라모비치는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모스크바와 벨라루스 등을 이동하며 양국 평화협상에 관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에 이상 증세를 보인 지난 3일에도 키이우에서 열린 비공식 협상에 참여 중이었다고 <가디언>이 익명의 소식통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아브라모비치 등이 중독 의심 증상이 나타나기 몇 시간 전까지 먹은 것은 초콜릿과 물뿐이었으며, 이후 회복돼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를 거쳐 폴란드로 간 뒤 다시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했다. <가디언>은 아브라모비치와 우메로프는 터키에서 함께 치료를 받았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와 협상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 강경파들이 아브라모비치 등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 등이 화학·생물학적 또는 방사성 물질 공격을 받았는지 명확히 결론 내리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2020년 러시아 야권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신경작용제 중독 사건을 조사했던 탐사 보도 전문 매체 <벨링캣>의 흐리스토 그로제프가 이들의 증상을 찍은 사진을 살펴봤으나, 협상단 일정이 바빠 적시에 샘플을 채취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나중에 독일의 한 포렌식팀이 조사에 나섰으나, 독극물을 발견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조사팀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이번 공격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경고를 하려는 의도”라는 견해를 밝혔다. 아브라모비치를 만났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특별한 이상 증세를 보이지는 않고 있다.
아브라모비치의 증상과 관련해 논란이 이어지는 것은 러시아가 정권에 비판적인 인물에 대해 독극물 공격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2020년 시베리아 지역의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의식을 잃었던 나발니 사건이다. 나발니는 이후 독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의식을 되찾았다. 독일 정부는 나발니가 소련이 냉전시대 개발한 신경작용제 ‘노비초크’ 계열의 화학 신경작용제에 중독됐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당국은 아브라모비치와 협상단의 중독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미국 정부의 한 관리는 이들의 증상은 “중독이 아니라 환경적 이유 때문”임을 시사하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도 아브라모비치 독극물 중독설을 부인했다. “모든 사람이 선정적 뉴스에 목말라 있다”고 국영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와의 협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협상장에서) 어떤 것도 마시거나 먹지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충고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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