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서쪽 지역 모티진에서 4일(현지시각) 주민들이 모래에 덮인 채 방치돼 있던 여성의 주검을 수습하고 있다. 모티진/로이터 연합뉴스
전세계에 충격을 안긴 ‘부차 대학살’에 이어 키이우 서쪽 도시 모티진에서도 민간인들의 주검이 잇따라 발견되며, 러시아군이 점령지에서 광범위하게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을 것이란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도 긴급보고서를 내어 러시아군의 다양한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4일(현지시각)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45㎞ 떨어진 모티진에서 이 마을 지도자와 그의 아내와 아들이 숨진 채 모래에 덮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안톤 헤라시첸코 우크라이나 내무부 고문은 <로이터> 통신에 “러시아 점령군들이 마을 지도자 올하 수헨코와 그의 아내, 25살짜리 아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점령군은 이 가족이 우크라이나군에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우크라이나군 포대의 위치를 말하라고 요구하며 고문했다”고 말했다.
숨진 수헨코의 아들과 사귀던 여자친구는 이 가족이 지난달 23일 러시아군에게 붙잡혔다고 증언했다. 이날 오전 수헨코의 집을 수색하고 떠났던 러시아군이 몇시간 뒤 다시 돌아와 가족을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것이다. 일가족은 이후 모래에 덮인 주검으로 발견됐다.
통신은 모티진 외곽의 파괴된 농장에서도 주검이 여럿 발견됐다고 전했다. 주검은 대부분 모래에 덮여 있었고, 그중 한 구의 머리엔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또 다른 농장에서 발견된 주검은 우물에 묶인 채 숨져 있었다. 모티진 시의회 대표인 바딤 토카르는 주검들 주변에 지뢰가 매설됐을지 몰라 그동안 주검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휴먼라이츠워치가 지난 3일 공개한 긴급보고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점령 지역 내의 명백한 전쟁범죄’에도 비슷한 증언이 넘쳐난다. 이 단체는 10명의 목격자·피해자·주민들과 인터뷰해 지난 2월27일부터 3월14일 사이에 러시아군이 저지른 명백한 여러 전쟁범죄를 고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3월4일 대학살이 일어난 부차에서 민간인 다섯명을 둥글게 모아놓고 그중 한명을 ‘즉결처분’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목격자는 “러시아군이 다섯명에게 도로 한쪽에 무릎을 꿇으라고 한 뒤, 티셔츠를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고 말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다섯명 가운데 한명의 머리 뒤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는 앞으로 쓰러져 숨졌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여성은 비명을 질렀다.
북부 도시 체르니히우의 한 마을인 스타리비키우에선 2월27일 러시아군이 비슷한 방식으로 최소 여섯명을 모아놓고 모두 즉결처분했다. 이 사실을 증언한 이는 이때 숨진 희생자 가운데 한명의 어머니였다. 키이우 북서쪽 도시 보르젤에선 3월6일 러시아군이 민간인들이 대피해 있는 지하에 수류탄을 던진 뒤 밖으로 빠져나오는 엄마와 14살 된 아이를 쏘아 죽였다. 같은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남성은 아이는 즉사했지만 엄마는 이틀 뒤에 숨졌다고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 살던 한 여성(31)은 러시아 병사가 3월13일 가족들과 함께 대피해 있는 학교에 찾아와 자신을 총으로 위협하며 거듭 성폭행했고, 그 과정에서 칼로 얼굴과 목을 베였다고 증언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4일 대학살의 현장인 부차를 방문해 동행한 기자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세계에 보여달라. 러시아군이 한 일, 러시아가 평화로운 우크라이나에서 한 일을 알리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군이 저지른 잔혹행위는 “전쟁범죄이며 국제사회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인정될 것”이라며 “여기서 벌어진 일을 본 상황에서 (러시아와)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등 핵심 쟁점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5차에 걸쳐 진행된 평화협상을 접을 수도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별도 화상연설에선 “(키이우 서쪽 도시) 보로댠카 등 다른 탈환 도시들의 희생자가 (부차 대학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다. 키이우·체르니히우·수미 등 여러 마을에서 점령군들은 80년 전 나치 점령 기간에도 볼 수 없었던 짓을 했다.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규탄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외교장관도 부차에서 벌어진 학살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격전이 진행 중인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바실리 네벤자 유엔 주재 러시아대사는 이날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러시아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며 부차의 민간인 학살 의혹 관련 영상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전날 성명에선 이번 학살 의혹을 러시아를 겨냥한 우크라이나의 ‘도발’이라고 규정했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진 않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황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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